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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Apr 15. 2016

어른이 된다는 건

엄마의 오랜 버릇



우와, 조카가 학교 갈 나이가 됐어?



우리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 쪼끄맣던 아이가 벌써 8살이 되었다니. 표정을 보니 당사자 역시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리들 사이에서 처음 조카를 본 친구는 거의 매일을 붙어 지냈는데, 하루하루 커가는 과정을 모두 들려주었던 터라 마치 우리 모두의 조카 같은 느낌이었다. 얘들아, 이제 조금씩 고개를 가누기 시작했어. 오징어 같이 몸을 비비 꼬아. 보행기 타는 걸 어찌나 좋아하는지. 이제 눈 마주치면서 웃기도 한다? 이모는 발음이 어려운가 봐. 곧 나도 불러주겠지? 잔뜩 신이난 친구의 표정 속에서 우린 새 생명이 주는, 말로는 다 표현 못할 행복감을 느끼곤 했다.



얼마 전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형부가 집에 오면 언니가 맨날 '당신 왔능교~'하면서 나가거든? 근데 지난주엔 형부가 벨을 띵똥 누르니까 조카가 놀던 거 다 내려놓곤 당신 왔능교, 하면서 현관으로 달려가는 거 있지. 우리 진짜 자지러지게 웃었잖아.



'엄마' '아빠'만 할 줄 알던 조카는 어느새 집에 있는 누군가의 말을 하나 둘 따라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요즘 현관문 열기 전에 이 말은 조심해야겠다, 꼭 생각하고 들어가잖아. 친구는 단어 하나 쓰기도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자그마한 아이는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말도,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작은 버릇까지도 금세 따라 한다고 했다. 덕분에 온 가족은 바짝 긴장한 채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의 말에 나는 20살 무렵, 어느 여름날이 떠올랐다.



아유, 됐어. 엄마는 바닥이 더 좋아. 너도 여기 누워 봐. 바람도 불고, 참 시원하다.



창문을 닫아두어도 매미 울음소리가 방 안까지 들려오던 날이었다. 느지막이 점심을 먹은 엄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무것도 깔려있지 않은 거실 바닥에 스르륵 누웠다. 엄마, 여기 딱딱한데 소파나 침대에 누워. 저기로 옮기자. 내 말에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됐다 됐다 여기가 제일 좋다, 손을 저으며 두 다리를 쭈욱 뻗었다. 언제부터인지 엄마는 푹신한 침대보다 아무것도 깔지 않은 딱딱한 바닥에 눕길 좋아했다. 나는 그게 단지 자리를 옮기기 번거로워서인 줄 알았다.



나중에 너도 엄마가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만, 너희들 키울 땐 말 하나, 행동 하나도 그냥 하질 못했어. 아주 작은 부분일지라도 내가 모르는 사이 너희의 버릇이 될까 전전긍긍했지. 이렇게 바닥에 눕는 것도 그땐 어찌나 신경이 쓰이던지. 이건 괜찮나, 저건 괜찮나, 다 따져보면서 늘 바른 모습만 보여줘야겠다 생각했거든. 그래야 너희가 모난 거 없이 잘 자랄 거라고 믿었으니까. 근데 이젠 그냥 이렇게 편하게 누워버려도 다 이해할 나이가 됐잖니? 그게 참 좋아. 엄마도 가끔 이렇게 풀어지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말이야.



엄마의 말대로 내 추억 속 엄마는 언제나 반듯한 모습이었다. 꼿꼿이 세운 허리와 옅게 머금은 미소, 가지런히 모은 두 손. 낯선 이든 가까운 이든, 큰 감정 변화 없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모습이 늘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 엄마가 조금 편안해진 것 같다 처음 느낀 건, 우리 세 남매 모두 스무 살이 넘은 시점이었다. 엄마는 그제야 오롯이 엄마 자신이 된 것 같았다. 누워서 노래 듣기를 좋아하는 엄마, 혼자 산책을 하는 것도, 종일 책 보기도 좋아하는 엄마. 어릴 땐 낯설다 느껴졌던 모습들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가며, 보이기 시작했다. 세 남매의 엄마가 아닌, 한 사람이.


우리는 시원한 바닥에 누워 종일 매미소리를 듣고, 살랑살랑 여름 바람을 즐겼다. 어느새 잠이 든 엄마의 얼굴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무척이나 편안해 보이는 미소였다. 내가 조금 더 빨리 어른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훌쩍 자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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