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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Apr 19. 2016

너도 잘 몰라

어떤 걸 잘할지, 어떤 걸 좋아할지



'잠깐이라도 보자'



이 말이 참 좋다. 굳이 무언갈 함께 하지 않아도, 서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그 감정에 대한 숨김없는 표현. 오랜만에 연락이 온 그녀는 이번에도 이 말을 가장 먼저 건넸다. 그래. 보자. 보자. 오늘 같은 날, 널 봐야 기운이 나지. 직업 특성상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은 우린, 약속을 정하면서도 혹시 모를 변동에 대해 서로에게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이번 주말 업무는 비슷한 시간대에 마무리지어졌다.



우리 회사에 되게 멋있는 분이 계셔.



반 년 만에 보는 얼굴. 그녀는 처음 본 그때처럼 싱그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근래 있었던 좋은 소식들을 주고받고 나니, 대화는 자연스럽게 회사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녀는 그날, 함께 일하고 있는 20년 차 카피라이터 분의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내공이 쌓인 그분은, 그분 만의 독특한 감성을 갖고 있었다. 딱 한 줄일 뿐인데, 읽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느낌 알아? 글 구석구석에 온기가 담겨있는 것 같아. 그분이 아니면 쓸 수 없을 글이라고 했다. 몇 줄만 읽고도 글쓴이를 알아차릴 수 있으려면 과연 얼만큼의 노력이 필요할까. 짐작이 잘 가지 않았다.



맞아, 그게 참 멋있지. 자신 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다는 게. 근데 최근에 진짜 멋있는 분이구나, 느낀 건 글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에 꾸준한 관심을 두신다는 거야. 작년 여름쯤인가. 갑자기 시나리오 쪽이 궁금해졌다고, 곧바로 학원에 등록하시더니 그저께 그게 정말 영화로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시는 거 있지. 배우는 단계까지 가는 것도 어려운데, 또 다른 직업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쌓으셨다는 게 진짜 대단한 것 같아. 나는 회사 일 하나 하는 것도 이렇게 버거운데.



아웃풋보다는 인풋이 많아야 할 시기라고, 그게 꼭 일과 관련되지 않아도 좋으니 뭐든 넣어 두라고, 나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해주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을 했다. 바쁘다고 미뤄두면 안 돼. 네가 뭘 좋아하는지, 네가 뭘 잘할지는 해봐야 안다. 그건 너 자신도 몰라. 아니다. 어쩌면 너라서 더 모를 수도 있어. 지금까지의 경험만 놓고, 이건 못할 거야, 이건 잘할 거야 미리 재게 되거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었지만, 매번 시작까지 가지 못했다. 배우기도 전에 겁을 먹거나, 확인해보기도 전에 뒷전이 되거나.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짐으로만 끝난 날들이 생각나서였다.



그래서 말인데, 나도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거든? 맨날 해야지 해야지 하고 반년째 찾아보지도 못하고 있어. 이렇게 언니한테 꼭 배울 거라고 얘기해두면 책임감을 갖고서라도 하지 않을까? 속으로 해야지 해야지, 하는 거보다 이렇게 가까운 사람한테 할 거다 할 거다, 이야기해두는 게 훨씬 효과가 좋대. 그 카피라이터 분도 그랬고. 그때의 설레는 표정이 너무 좋았어.



조그만 손으로 무언갈 만들기 좋아했던 그녀는 도자기 굽는 걸 꼭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너무 잘 어울리는 일이라 나도 모르게 이번 주에 당장 알아보자, 대답하고 말았다. 진짜 곱게 잘 빚을 거 같아. 꼭 해봐야 해, 꼭. 그녀는 입술을 앙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도 언니 만의 문체가 있을 거야. 그게 차곡차곡 쌓이면 더 많은 걸 해낼 수 있을 거고. 동생은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가능성이란 것은 다른 데 신경을 쏟는 사이, 저만치 달아나버리기 쉬웠다.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채, 훌쩍 지나가버린 것은 제 시기를 기다리다 지쳐 떠나버린 것 같았다. 그날, 다시 떠올려보았다. 나를 스쳐지나간 몇 몇 가능성들을. 그리고 다시 마음을 먹었다.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몇 번이고 가슴 뛰는 것을 찾아 떠나는 그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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