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가볍지 않은 어른들의 고민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불어오는 바람. 우리 둘 사이엔 매콤한 향이 솔솔, 공기의 움직임에 따라 짙어졌다 옅어졌다 했다. 유난히 손가락이 길었던 그는 윤기가 흐르는 밥알 위로 카레 소스를 두 어번 얹어 섞었다. 그 일을 정말 좋아해서 꽤 오래전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해 왔지, 아마. 그걸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그 일을 좋아하는 친구였어. 이게 그와 가깝게 지낸 사람들의 일관된 말이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본 모습은 이야기 속의 인물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내 일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요즘은 회사에 있는 시간이 가장 아깝습니다."
이제 5년 차에 접어들었다는 그는 한 분야에서 손꼽히는 곳에 입사해 줄곧 경력을 쌓아왔다고 했다. 그 영상 봤어? 되게 괜찮더라, 라는 말이 나오는 것들 중 그 팀에서 만든 영상이 꽤 있었고, 권위 있는 단체들의 평가에서도 늘 상위권을 차지했다. 나는 제작자 명단에 적힌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할 때마다 정말 이 일을 좋아하는구나, 그러니 이렇게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거겠지, 싶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 일을 통해 전과 같은 만족감을 얻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신 만들어주는 느낌이랄까요. 어떤 일이든 안 그렇겠냐만은, 그 안에 내 생각이 조금이라도 담기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엄청나죠. 처음엔 그게 아니어도 괜찮았지만, 연차가 쌓일수록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느껴져요. 얼른 그만두고 내 일을 해야 하는데. 정말 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는데. 요즘은 이 생각이 자꾸 드네요."
그릇이 깨끗이 비워지는 동안, 우리는 다가 올 미래에 꼭 만들고 싶은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금은 각자 다른 회사에 있지만, 언젠가는 꼭 뭉쳐 우리 것을 만들자, 약속한 친구들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시간을 쪼개고 쪼개야 겨우 만나는 정도지만, 그때는 오로지 그것에만 매진하자고. 나는 그게 꿈같은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도 충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을까, 내 생각이 조금이라도 담긴다면 그 일을 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금전적으로 안정되는 길을 택할 것인가, 심적으로 자유로운 길을 택할 것인가. 그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면, 다른 쪽으로 불안한 게 생기잖아요. 그 사이에서 매일 왔다 갔다 해요. 저뿐만 아니라, 제가 믿고 따르는 몇몇 선배 들도요. 하지만 내 일을 찾겠다고 떠난 사람 중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없진 않으니까."
우리는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한 잔씩 들고, 근처를 조금 걷기로 했다. 맑은 날씨에 이끌려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한가로이 낮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테라스를 활짝 열어 둔 어느 카페 구석엔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쉼 없이 타자를 두드리는 여자가 보였다. 저 사람은 작가일까요? 이 시간에 이곳에 있는 걸 보면 아마도 프리랜서 겠지? 우리는 속도를 줄인 채,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 근처를 걷다 보면, 그녀처럼 홀로 무언가에 집중해 있는 사람들과 자주 마주칠 수 있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2-3개의 일회용 잔과 빈 샌드위치 그릇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녀는 출력해 온 서류들을 살폈다가 다시 화면을 뚫어져라 보았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거리 위로 시선을 옮겼다. 우르르 우리 옆을 지나가는, 사원증을 목엔 멘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같았다. 남들 다 일하는 시간에 홀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걸 보니, 팔자 좋다. 정장을 차려입은 회사원 무리 중 한 명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우리의 일을 찾아야죠. 집 밖에서든, 집 안에서든."
그가 인사를 나누며 건넨 말이 테라스에 있던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문득, 지겹도록 들어온 어떤 말이 생각났다. 누군가가 했던 말처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 아니면 수없이 많은 날들 중 첫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지런히 사라져 가는 시간 속에서 이렇게 헤매는 것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때 그녀는, 그녀를 잡아먹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택한 건지도 몰라. 그래서 그때 그는,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건지도 몰라.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 속에 울고 웃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사라졌다. 내일은 꼭 이게 '내 일'이라고, 기쁜 얼굴로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주하길 바라는 마음, 부디 이 시간들이 헛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우리 모두가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