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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Nov 08. 2015

겁 내지 마라, 가시나야.

연남동 사장님이 된 부산 남자


사회에서 만난 사람과 속내를 터놓고 지내기란 쉽지 않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그렇다. 서로 좋은 모습만 보여줄 수 있는 적정 거리를 찾아 그걸 유지하려 애쓰는 게 대부분인데, 재작년 한 외부 모임에서 만난 네 사람은 신기하리만큼 단시간에 가까워졌다. 이상했다. 술에 취해 눈물을 뚝뚝 훌려도, 회사 스트레스로 하루 종일 툴툴 거려도, 여자친구 때문에 갑작스레 약속을 파투 내도- '됐어. 다음에 밥 사.' 한 마디만 할 뿐,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행동을 해도 서로를 이해해주는 진득한 모임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한 살 터울인 부산 남자와는 스스럼없이 모든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건축을 전공한 그는 만드는 것이라면 뭐든 좋아했다. 영상, 디자인, 작사, 작곡, 심지어 요리까지도 잘 했다.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아 막힘 없이 대화가 잘 통했는데 유일하게 딱 한 부분이 달랐다. 낯선 일에 있어 겁이 없다는 것이었다. 겁 많은 내겐 연구 대상이자 신선한 자극제일 수밖에 없었다. 잃을 게 참 많은 사람임에도 마치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사람처럼 늘 새로운 일에 뛰어들었다. 좋아하는 일 앞에 한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엔 항상 무언갈 다짐하곤 했던 것 같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오빠는 겁이 하나도 없는가베'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술잔을 쭈욱 들이키던 그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세상에 겁 없는 사람이 어딨겠나. 바보가."


"요리해야지 하더니 메뉴 턱턱 만들고, 푸드트럭 해야지 하더니 인테리어 뚝딱뚝딱 완성하고. 가게 내야지 하더니 진짜 사장님이 됐잖아. 인스타그램에서 오빠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 이게 겁이 없는 거지, 그럼 뭐야."


아트디렉터로 일하다 하루라도 빨리 자기 일을 하고 싶어 일찌감치 연남동에 푸드트럭을 차린 그였다. 함께 밤샘 작업을 할 때면 동생들에게 맛난 음식을 맥인다며 종종 요리를 해오던 그였기에 시기가 조금 당겨졌구나 생각했을 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음식 맛은 한결같이 훌륭했다. 애정이 듬뿍 담긴 음식이 별로일 리 없었다. 입맛 까다로운 남자친구도 엄지 손가락을 번쩍번쩍 들었다. 생전 처음 맛보는 독특한 메뉴도 많았는데, 어딜 가나 재료의 새로운 조합을 고민하고 또 고민한 결과였다. 만들어보고 먹어보고를 반복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사람은 역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푸드트럭을 오픈한지 이제 6개월. 그에게는 자그마한 가게가 생겼다. 짧은 기간 안에 얻은 놀라운 성과였다.


"인마. 그 과정 다 보고도 고런 소리가 나오나. 나라고 왜 안 무서웠겠노. 오픈  첫날, 연남동 거리 한 복판에 혼자 서있는데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싶드라. 관심 가져주는 이도 없고, 눈길 주는 이도 없고. 그게 을매나 무서운 건지 아노.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나만 알지. 그 과정 하나하나 놓고 보면 겁이 나지 않은 순간이 없다. 그저 그때그때 즐기는 거에 집중하려고 노력한  거뿐이지.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물어봐라. 뭔갈 이뤄본 사람이라면 분명 겁나던 순간도 있었을끼다. 남들에겐 과정보단 결과가 더 눈에 들어와서 그런거제."


올여름을 그 푸드트럭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자주 찾은 나인데 그의 얼굴에서 두려움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즐겁기 만한 일일 거라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느 정도의 손님이 찾아올지 아직까지도 염려스럽지만, 요리 도구만 손에 들면 그대로 몰두해 버리는 게 '아, 나는 분명 이 일을 즐기고 있구나.' 생각이 들어 금세 행복해진다고 했다. 푸드트럭을 처음 열었던 그날처럼 가게 상황이 어떻게 될지 걱정되지 않는다면 아마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항상 설렘이 두려움을 이기기 때문에 괜찮다고, 그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겁 내지 마라. 나도 뭐 오래 살아본 건 아니지만, 인생 별 거 없는 거 같다. 좋아하는 사람 만나고, 좋아하는 일 하고. 그게 전부아이가. 서울로 대학 오기 전부터 혼자 아등바등, 이것저것 해보면서 실패도 참 마이 했는데 생각보다 잃는 거 별로 없드라. 못해본 게 한이 되지, 실패한 게 한이 되진 않는 거 같다."


나는 격하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어깨를 한 번 툭 치더니 굵직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러니까 겁 내지 말라고, 가시나야."


"알았다, 이 자슥아."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날 밤, 연남동 거리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다음 달이면 그의 가게도 이 거리 어딘가에서 불을 밝히고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가게보다도 따스한 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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