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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Nov 09. 2015

사랑에 빠졌다는 증거

변화만이 증거는 아니다


키가 그다지 큰 편이 아님에도 늘 단화를 고집한다. 눈 화장은 주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하고, 평소엔 기초 화장 정도만 한다. 청바지와 티셔츠를 좋아하고, 맛집에 가는 걸 무지 무지 좋아한다.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세상 가장 착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되기도 하며,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한 없이 어린아이가 되기도 한다. 평소의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하이힐을 좋아했다. 긴 머리, 쌍꺼풀 없는 눈도 좋아했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을 좋아했다. 괜찮아 괜찮아 한결같이 다독여주는 나를 좋아했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무던하게 허허 웃어버리는 나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건 진짜 내가 아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한 대외활동에서였다. 전국 곳곳에서 모여든 15명가량의 청년들은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좋은 곳에 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특히 시작부터 분위기가 좋았던 우리 팀은 대외활동 전부터 잦은 모임을 가졌고,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돼 있음에도 금세 가까워졌다. 활동이 끝날 무렵엔 온통 눈물 바다가 될 정도로 정이 들어버렸다. 유독 그 아쉬움이 컸던 그 사람과 나, 우린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그는 나에 대한 뚜렷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6개월 동안 그의 머릿속에 새겨진 내 모습은 항상 긍정적이고 밝았다. 비교적 나이가 많은 편이라 동생들을 챙기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고, 그러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그 모임 안에서의 나는 항상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무척 싹싹한 아이로 자리 잡았다. 그게 진짜 내 모습이 아니었던 건 아니다. 분명 내 부분 중 하나였겠지만, 문제는 그가 그런 모습 만을 보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초반엔 그가 바라는 이미지에 따라 달라지는 내가 좋았다. 변화하는 만큼 그를 사랑한다 믿었다. 하루 종일 집에 가고 싶단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하이힐도, 예민한 눈가가 따꼼따꼼해지는 메이크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이어트를 하면 더 예뻐질 것 같다는 말에 그날 저녁부턴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친구들을 자주 만나는 게 서운하다는 말에 약속도 반으로 줄였다. 이 불편함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왠지 모를 공허함이 밀려왔다. 때론 풀린 모습도 보여주고 싶고, 응석도 부리고 싶은데 그 사람 앞에선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조금만 달라져도 그는 '변했어'란 말을 하기 일쑤였고, '사실 나는 변한 게 아닌데, 이런 모습의 나도 있는 건데.'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일은 갈수록 빈번해졌다.


결국 인생 최저 몸무게를 찍고 나서야 이 변화가 사랑의 증거가 아님을 깨달았다. 연애 초반에야 그게 어찌 괴롭고 힘들게 느껴질 수 있을까. 그를 만나러 가기 전 예쁘게 단장하는 것이, 속상한 일이 있는 그를  말없이 다독이는 것이 결코 힘든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정해놓은 이미지에 따라 나를 포장하기 급급한 나를 원했던 건 아니었다. 그건 진짜 내가 아니었다. 함께 나눈 시간이 쌓여갈수록 몰랐던 부분까지도 알게 되는, 비록 그게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를지언정 그 모습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게 내가 바라는 '연인'의 모습이었건만, 나는 자꾸만 고개를 젓게 되었다.


그와의 이별을 선택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모든 걸 털어놓고 돌아선 순간, 왠지 모를 후련함이 느껴졌다. 평생을 함께 해도 좋을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스스로 멈칫했기 때문이었다. 연극을 하며 살고 싶진 않았다. 그게 설사 영화 속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길일지라도 나는 나 다운 길을 택하기로 마음 먹었다. 분명 그 모습을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 테니까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걸 더 이상 겁내지 않기로 했다.    



" 최선의 방법은 네 자신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찾는 거야.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추하거나 예쁘거나, 잘 생겼건 네가 뭘 가졌건 진짜 짝이라면 네 엉덩이에서 빛이 난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 사람이 곁에 있을 가치가 있는 거지. "

ㅡ영화 '주노' (2007) 中 아버지가 딸에게 건네는 대사


그때에 비해 나는 참 수수해졌다. 다시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기 시작했고, 내 키가 그대로 드러나는 단화를 신는다. 예쁜 말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론 미운 말도 하고, 어른스러운 척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생떼를 부리는 날도 있다. 깐족거리는 모습을 보며 꿀밤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미울 날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괜찮다 말해주는 누군가가 지금 곁에 있다. 이렇게 제멋대로인 나를, 이렇게 못난 구석이 많은 나를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이 있어 걱정 없이 내 있는 모습 그대로 흠뻑- 사랑에 빠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사랑을 확인할 때도 있지만, 내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사랑을 확인할 때도 있다. 나의 경우, 후자일 때 더 큰 사랑을 느끼는 것 같다. 비록 서로에게 실망하는 일이 생길지라도, 행여 서로가 몰랐던 낯선 모습을 발견할지라도 이 사랑을 함께 이어갈 수 있으리란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무엇보다 나는 그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무척 솔직한 사랑을 하고 있다.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시작해 서로에 대한 믿음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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