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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Nov 11. 2015

그때 그 입사 시험

불합격 속에서도 배운 게 있었다


"망했다. UCC도 제출해야 해."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반면 함께 공고 글을 확인한 그는 반짝반짝한 눈으로 '재밌겠다' 얘기했다. 이미 업계에 발을 들인 그와 달리 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취준생이었다. 서류전형에 적힌 자기소개서, 에세이, 거기에 UCC까지. 필기시험은 또 뭐며 면접은 왜 두 번이나 보는 건지. 모든 것이 버겁게 느껴졌다. 가장 염려되는 UCC부터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지만 시작도 전에 근심으로 가득 찼다. '만원으로 세상을 즐겁고 유쾌하게 만들기'라- 아, 이 과제를 어찌 풀면 좋을까.


15일가량의 시간이 주어졌고 매일 과제 한 줄을 머릿속에 넣고 다녔다. '인사팀이 좋아할 만한 답이 뭐지?' 그 생각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점심시간, 우르르 모여 자판기 커피를 뽑아먹는 직장인들을 보며 '만원을 동전으로 바꿔 자판기 가득 채워볼까?', 예고 없이 비가 쏟아지던 날, 우산 없이 뛰어가는 학생을 보며 '우산  두세 개쯤 사서 훈훈한 메시지와 함께 정류장에 세워둘까?' 생각했다. 항상 마지막엔 '그들은 뭘 좋아할까?' 떠올리며 아이디어를 다시 평가해봤다. 그 과정을 반복할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인사팀이 좋아하는 거 말고 하고 싶은 걸 해보면 어때. 결국 네 시간 투자해서 만드는 건데 그 사람들 입맛에만 맞추면 재미없잖아. '세상을 즐겁게 만들고 싶다' 그것 때문에 이 일이 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이만큼 자유로운 과제가 어디 있어. 못해봤던 거 도전해보라는 거지. 다시 오지 않을 네 시간이라고. 인사팀은 좀 저~만치 밀어 두고 네가 하고 싶었던 게 뭐였는지부터 생각해봐. 응?"


'인마 인마 넌 현직인이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지' 나는 괜한 심술을 부렸다.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 옳다는 걸. 하지만 그 당시엔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내가 가고자 하는 업계에서 공채로 신입을 뽑는 회사는 고작  2-3군데뿐인데 어찌 집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그들의 입맛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시간은 자꾸 흘러갔고 그럴수록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 새벽까지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기로 했다. 카페를 빠져나와 무작정 첫차에 올랐다.


맨 앞자리에 앉아 '세상을 즐겁게 만들고 싶다' 그 마음을 처음 가졌던 때를 떠올려봤다. 내가 쓴 글, 내가 만든 영상, 우리가 만든 캠페인을 보며 누군가는 하루 한 번 크게 웃고, 크게 한 번 가슴 찡해봤음 좋겠다 생각했다. 그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달려온 나였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다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끊임없이 인사를 건네는 기사님이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치 10년 넘게 타고 다니는 버스였다. 왜 그때 그 장면이 눈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기사님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7시가 지나자 하나 둘 비어있던 자리가 채워졌다. 빠르게 달리던 차들도 조금씩 속도를 낮췄다. 그렇게 얼마를 더 달렸을까. 5-10분가량 버스가 정차해 있게 되자 기사님은 서둘러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차갑게 식은 삼각김밥과 우유였다. 앞에 차가 움직이기 전에 얼른 포장지를 뜯어 한 가득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내가 원하는 '세상을 즐겁게 만드는 방법'이 번뜩 떠올랐다. 지금 당장 이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집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나온 뒤, 가까운 마트로 향했다. 조그만 쌀 한 봉지와 볶음밥 재료를 골랐다. 약국에 들러 비타민 음료도 몇 병 샀다. 집으로 돌아와 밥을 지으며 재료들을 하나하나 다듬었다. 오랜만에 해보는 요리였다. 사실 요리라고 하기도 민망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보는 게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뜨끈한 밥을 접시에 옮겨 담고 한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주먹밥을 조물조물 만들었다. 김가루도 듬뿍 듬뿍 묻혔다. 그렇게 3세트의 미니 주먹밥 도시락이 완성됐다. 쇼핑백에 도시락과 음료를 담았다. 짤막한 손편지도 함께.


아침이 밝아오자 나는 다시 첫차를 기다렸다. 자주 타고 다니는 버스 세 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자, 준비! 처음 하는 일이라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입술을 꾸욱 깨물며 버스에 올랐다. 한두 번쯤 본 적이 있는 기사님이었다. 신호에 걸리자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기사님께 슬그머니 다가가 쇼핑백을 건넸다. 수많은 사람들의 아침을 열어주는 그분들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보았다.


"기사님, 조금 당혹스러우시겠지만 기사님이 반갑게 인사해주시면 그날은 왠지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요. 아침 꼭 드시고 운전하세요."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하는 초등학생처럼 쇼핑백을 훅 건네고 황급히 자리로 돌아왔다. 쑥스러움이 많은 나지만, 그날은, 그날만큼은 10년 간 나의 등굣길, 출근길을 함께해준 이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그분들이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면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도 자연스레 좋은 기운을 나눠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날 만난 세 분의 기사님들은 이런 걸 받아도 될지 모르겠다며 아이처럼 순수한 웃음을 지었다. 하차하는 순간 '고마워요!' 또 한 번 큰소리로 인사를 해주었다. 처음 해보는 낯선 일이라 정류장에 내려서도 한참 동안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하길 잘했다, 하길 잘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후 최종면접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한동안 깊은 시름에 빠져있어야 했으나 2년도 더 지난 지금, 그때를 떠올리면 이제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합격을 했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다. 반대로 야근에 찌들어 투덜대고 있을 수도 있고. 그건 누구도 모를 일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사실은 나는 세상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을 해나가고픈 사람이고 끊임없이 그런 일을 찾아갈 거라는 것이다. 그날의 공기와 온도, 기사님들의 미소와 거리의 풍경- 내게 있어 가치 있는 일이란 무엇인지 짙게 새겨진 날이었다.


어제 카페에 앉아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는 한 학생을 보았다. 기업 홈페이지와 워드를 켜놓은 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그를 보며 그때 생각이 났다. 직장인 2년 차에 접어든 지금, 조심스레 이런 말을 건네고 싶다. 기업이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것도 물론 매우 매우 중요하다. 그 사실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나에 대해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으면 한다. 무작정 주먹밥을 싸 봐도 좋고 나의 지인처럼 지저분한 길거리 벽에 그림을 그려봐도 좋다.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미친 듯이 읽어봐도 좋고, 주변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인터뷰해봐도 좋다. 그 방법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합격여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고 그 결과를 가지고 어떤 것이 맞고 틀리고 어떤 이가 더 잘났고 못났고를 판단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런 시간이 더더욱 필요할 거란 생각이 든다.


한 기업에 나란 사람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가슴이 뜨거워지는지, 어떤 일을 할 때 세상 참 살만하다 느끼는지 조금 더 유심히 들여다본다면 좋겠다. 그 시간은 본인에게 맞는 직업을 찾아가는 데 있어, 삶 전체를 살아가는 데 있어 든든한 나침반 역할을 해줄 거라 믿는다.


조만간 주먹밥을 한 번 더 만들어 봐야겠다. 이번엔 금액 제한 없이 재료를 듬뿍 듬뿍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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