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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Nov 17. 2015

그 속을 누가 알까

수많은 말보다 한 번의 느낌


그와 투닥거릴 때면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그때 내가 먼저 말 안 꺼냈어 봐. 흥."


그럼 익숙하다는 듯 그는 그걸 말로 해야 알아, 당연한 걸 묻고 그래, 받아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여자와 남자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구나 싶다. 아, 성별에 관계없이 각자가 느끼는 바는 참으로 다른 것 같다.


4년 전, 우리 동네로 이사 온 그는 뜬금없이 근처에 맛있는 떡볶이 집이 있냐고 문자를 보내왔다. 초중고를 다 이 동네에서 나온 터라 오래된 맛집을 술술 꿰고 있었다. 그럼요, 한 번 모시고 갈까요, 부담 없이 건넸던 말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하다. 그 잠깐의 순간이 이토록 오랜 인연으로 이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그도 나도 꿈에도 몰랐다.


내가 처음으로 안내한 곳은 이수역 골목에 있는 '디델리'였다. 고등학생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그곳에서 달달한 떡볶이와 참치김밥을 사이좋게 나눠먹고, 사당역까지 함께 걸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다음 주제는 뭘로 꺼내야 하지, 그런 고민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끊김 없이 대화가 오래도록 오고 갔다. 사당역에 도착한 우린 반디 앤 루니스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인문학 코너에, 나는 수필 코너에 한참을 서 있었다. 단 둘이 만나는 건 그때가 두 번째였음에도 왠지 모르게 편안했다. 각자 떨어져 책을 보는 동안 서로가 퍽 신경 쓰였을 법도 한데,  1-2시간쯤 지났을 무렵 자연스럽게 계산대 앞에서 만나 어떤 책을 봤는지, 어떤 책을 살 건지 이야기를 나눴다. 읽어보고 어땠는지 얘기해줘, 그게 다음 만남의 약속이 되었다.


그렇게 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의 문자가 와있지 않으면 왠지 허전한 사이가 되었다. 오늘은 뭐해, 점심은 뭐 먹니, 저녁엔 어디가, 하루의 스케줄을 서로가 알고 있는 게 당연했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깔깔깔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치기도 했고, 귀엽다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그때 스쳤던 손이 조금 까칠했던 게 기억에 남아 다음에 그를 만나러 가는 길, 자연스레 핸드크림을 샀다. 그때 처음 깨달았던 것 같다. 아, 나 이 사람 좋아하나 보다,라고.


그런데 그 생각이 들기 시작한 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졌다. '사귀자고 말했어?'라는 친구의 질문이 문제였다. 아니,라고 대답하자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난색 했다.


"그거 그냥 썸 타다 말려는 속셈 아냐? 이번에 손도 잡았다면서. 근데 별 말이 없었다고? 좋아한다, 만나고 싶다, 그런 말도 전혀 없었던 거야? 그런 거에 대해 너도 얘기해본 적 없고?"


펄펄 뛰며 온갖 질문을 쏟아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그런 말을 했던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잘 모르겠는데, 맹한 표정을 짓자 이런 순진한 애가 있나, 얘가 얘가, 친구는 근심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평온하게 흘러가던 우리 사이에 잠시 먹구름이 끼었던 게 이것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싶지만 그땐 작은 일에도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오르락 내리락했다.


"우리, 뭐야?"


그렇게 복잡한 심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 우리 앞에 툭 튀어나왔을 때, 그가 지었던 표정을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표정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안심했다.


"뭐긴 뭐야. 그걸 말이라고 해.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그는 내 말에 웃었지만 나는 그동안 맘 고생한 게 생각나 웃음이 나지 않았다. 나만 안절부절못한 것 같아 억울했다. 그런데 '고민하던 게 그거였어?'라며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와의 문제를 다른 곳에서 풀어보려 했을까, 여기 이렇게 확실한 답이 있는데 왜 자꾸 다른 곳에서 확인받으려고 했을까- 불안해진 나는 연애 경험이 화려한 친구들을 찾아 상황을 털어놓곤 그들의 이야기에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내 이야기만 듣고 내린 결론이었을 텐데, 내가 설명한 그는 실제의 그가 아닐 수 있는데, 무엇보다 확실한 그의 눈빛과 행동보다 다른 이들의 말에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이후에도 남자는 이래, 여자는 이래, 그런 말들이 평온하던 마음에 수시로 돌을 던졌다. 관심 있다면 이 정도의 연락은 기본이고, 이 정도의 표현은 당연한 거다, 누가 정한지 모를 애매한 기준들을 마주하다 보면 필요 이상으로 피로해졌다. 중간중간 트러블이 생길 경우, 다양한 조언을 구할 순 있었지만 그게 완벽한 답이 될 순 없었다. 결국 그를 보는 건 나고, 그를 만나는 것도 나였으니까.  


오늘도 자주 찾는 커뮤니티엔 수십 개의 글이 올라왔다. 이거 관심 있는 거 맞을까요, 제가 조금 더 표현해봐도 괜찮을까요, 이러면 부담스러워할까요, 게시판은 수많은 청춘들의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감정 표현에 있어 서툴고 겁이 많은 나였기에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았다. 내가 그 상황에 처했더라면 그들보다도 훨씬 더 불안해했을 게 분명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랬다. 누군가의 조언이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심시킬 때도 있었지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생생한 감정, 눈 앞에 있는 그에게 집중할 때 나는 가장 편안해졌다. 그것만큼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답은 없어 보였다.


때론 다른 것들을 향한 레이더망은 접어두고, 스스로의 '감'을 전적으로 믿어보는 건 어떨까. 그 안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진짜 답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행여 원했던 결과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괜찮다. 해볼 만큼 다 해 보고, 감정에 솔직할 만큼 솔직해 본 우린 그만큼 후회도 적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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