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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Nov 18. 2015

트레이너에게 푹 빠진 사연

우리 모두에겐 그런 존재가 필요하다


"난 딱 한 잔만 마실게."


그의 한 마디에 모두 같은 표정을 지었다. 퇴근 길, 치킨과 생맥주를 광적으로 좋아하던 그가 뜻밖의 선언을 한 것이다. 곧바로 '튀긴 음식도 안 먹을 거야'란 말이 이어지자 너나 할 것 없이 영문을 물었다. 지난달부터 1:1 피티를 받기 시작한 게 그 원인이었다. 큰 키에 다부진 몸, 부족한 것 없는 놈이 뭐하러 피티를 받냐, 옆에서 핀잔을 줬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때 띠링,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발신자는 ooo트레이너였다. '식사 전이시죠? 오늘 저녁은 뭐 드시나요'라는 내용이었다. 뭐야, 여자친군데, 다들 수상하단 표정을 지었더니 트레이너를 잘 만난 덕에 종종 도시락도 건네받고, 3개월 뒤엔 같이 대회도 나가 보자 제안했단다. 이야, 너 이제 헬스장에서 연애하는 거냐 물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트레이너는 젊디 젊은 아주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 사실에 우리 모두 탄식했다. 새롭게 만들어 본 닭가슴살 요리를 이미 저녁으로 먹었다면서 정말 안주 하나 없이 딱 맥주 한 잔만 마셨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 우린 뭔가 아쉬워 역 근처에서 커피 한 잔을 더 하기로 했다. 늘 망설임 없이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를 주문하던 그가 아, 난 카페인 안 돼, 하며 티 종류를 시키는 걸 보고 또 한 번 경악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해도 되나, 놀라울 따름이었다.


"근데 갑자기 웬 피티?"


"야근하는 것도 싫지만 일찍 끝나고 혼자 들어가는 길이 어찌나 적적한지 모른다."


그는 따끈한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대기업 사원 2년 차에 접어든 그는 엄청난 업무량으로 한동안 모임에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올해 신입이 두 명 들어오면서 그나마 얻게 된 여유였다. 그래도 평균 퇴근 시간은 8시를 훌쩍 넘었다. 회사 근처로 이사한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도 혼자 사는 데 익숙해지지 않는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고된 하루를 다 털어버릴 만큼 누군가와 진득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막상 누구를 불러야 할지 모르겠을 때가 대부분이라 그 허함을 운동으로 채워볼까 한다고 했다.


"어째 몸 관리보단 시간 때우려는 목적이 큰 것 같다."


그의 표정을 요리조리 살피며 조심스레 묻자 그는 꾹꾹 눌러둔 말을 하나 둘 뱉어냈다.


"뭐, 상술이라면 상술일 수도 있겠지만 하루 종일 내 일과를 확인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되는가 봐. 어딘가 좀 바보 같지. 주위에선 하나 둘 결혼하고, 애 낳고, 안 그래도 조바심이 나는데 거기다 여자친구는 왜 안 만드냐 지겹도록 물어대서 소개팅도 몇 번 해봤거든. 근데 이 나이 먹고 만나니까 나랑 안 맞는 부분이 훨씬 더 많이 보이고, 연애를 오래 쉬어서 그런가. 한 사람과 지속적으로 감정을 주고받는다는 게 부담스럽고 피곤하게 느껴져. 그렇다고 누군가가 나를 챙겨줬으면 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건 아니더라고."


무뚝뚝한 그가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자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나 역시 같은 걸 느껴본 적이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는데 이대로 하루를 마무리하기엔 뭔가 아쉬울 때, 비밀번호를 누르고 대문을 열었는데 불 꺼진 집안이 무섭도록 공허하게 느껴질 때- 이런 것들을 나만 느끼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자 조금 위안이 되었다. 이 시끌시끌한 세상 속에서, 이 수많은 만남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구나, 비단 우리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원래 사람이 그렇잖아. 둘이 있으면 혼자이고 싶고 혼자이면 또 둘이고 싶고. 그 중간쯤이면 참 좋을 텐데. 내가 지레 겁먹는 걸 수도 있지. 이기적인 걸 수도 있고. 그래도 좋더라. 잘 잤어요, 식사는 했어요,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 그런 질문들이. 묻는 대상이 여자든 남자든 성별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그냥 나의 안부를 물어 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는 거니까."


우린 환승역에서 인사를 나누며 '종종 서로 안부를 물어주자' 말했다. 사소한 질문들이 힘겨웠던 하루를 깨끗이 지워주기도 하니까, 그런 사람이 어딘가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음 날 아침 눈 뜨는 게 즐거워지기도 하잖아, 그가 씩 웃어 보였다. 맞다. 이 세상, 우리네 인생엔 그런 존재가 꼭 필요하다. 누구에게든.


수업 끝나고 집으로 향하고 있을 당신, 시계를 보며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을 당신, 추적추적 비가 와 울적할 당신에게도 조심스레 묻고 싶다. '저녁은 먹었어요? 지금 기분은 어때요? 힘든 일은 없었어요?'라고. 아, 이 말도 꼭 전하고 싶다. 오늘 하루도 잘 살아내느라 애 쓴 자신에게 잘했다 잘했다 이야기해주라고, 내일은 더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리고 지금 당신 머릿속에 떠오른, 안부가 궁금한 그 사람에게도 이 말을 꼭 전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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