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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Nov 22. 2015

망쳐도 괜찮아

나는 초벌 전문가였다


수많은 미술재료와 비릿한 물 냄새가 마구 뒤섞인 3층짜리 미술학원. 고등학교 시절, 학교보다 심지어 집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 쓱싹쓱싹 도화지 스치는 소리에 나는 편안함을 느끼는 아이였다.


셋째 고모와 막내 고모가 미대를 나온 덕에 아주 꼬마 때부터 어렵지 않게 미술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두 동생에게 자주 미술 재료를 사주곤 했던 아빠의 버릇은 고스란히 내게 이어졌다. 평일엔 퇴근하자마자 오늘은 어떤 걸 그렸는지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눴고, 주말엔 EBS에서 하는 밥 아저씨의 영상을 보며 함께 따라 그리기도 했다. 그렇게 자란 덕에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무렵, 누구 하나 먼저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음에도 스스로 미술학원에 다니고 싶다 말했다. 그림과 함께라면 남은 인생을 더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이곳저곳을 꼼꼼히 탐색해 본 끝에 강남구청에 있는 한 미술학원에 등록하기로 했다. 자그마한 키, 군데군데 남아 있는 턱수염, 콧대에 반쯤 걸터있는 안경, 그 뒤에 숨겨진 눈이 유난히 반짝이던 원장님은 '그림으로 밥벌이하고 싶으면 지금으론 택도 없다, 미친 듯이 그림만 그려야 한다' 거듭 강조했다. 앞으론 그림이 싫어지는 날도 있을 거라고 했다. 네네, 착실하게 대답했지만 그땐 입시가 어느 정도로 고된 일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매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다. 하지만 한 학년 한 학년 올라갈수록 미술학원은 점점 부담스럽고 무거운 공간이 되어갔다. 입시에 대한 부담감을 매일 온몸으로 체감했다.


"자, 한 번만 보여줄 거다. 똑바로 봐라. 석고 정물 수채화는 초벌이 제일로 중요하다. 탄탄한 밑바탕을 만들어놔야 그림에 깊이감이 느껴진다고. 제일 큰 붓 있지. 빽붓! 이걸로 그림자 부분을 일단 모두 눌러주는 거다. 널찍널찍하게. 그다음 조금 더 작은 붓으로 어두운 부분을 하나씩 꼼꼼하게 잡아주면서 색감을 넣는 거지. 탑 쌓듯이 차곡차곡. 그래야 입체감이 살아난다고. 초벌만 잘해도 반은 완성한 거다. 알겠나."


3수 끝에 홍대에 합격했다는 큰샘은 걸걸한 성미의 경상도 남자였다. 연필이나 붓을 사용할 때도 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대강 대강 칠하는 듯해도 2-3시간 만에 깊이 있는 그림을 뚝딱 완성하는 걸 보면 매번 입이 떡 벌어졌다. 밑바탕을 지나치리만큼 강조한 그의 영향으로 나는 초벌을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거친 입에서 몇 번의 칭찬도 듣게 되었다. 그 덕에 스케치부터 탄탄한 초벌까지 어렵지 않게 완성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이게 좋은 영향만 끼친 건 아니었다.  


"자, 이렇게 쌓는 게 훨씬 더 입체감 있어 보이지? 세심하게 쌓아야 해. 뭉개지지 않게."


큰샘에 비해 나긋나긋한 성격이었던 작은 샘은 중간중간 내 그림을 봐주곤 했는데, 그날도 부족한 부분을 마무리하며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나는 처음 등록하던 그날처럼 네네, 착실하게 대답했다.


"근데 말야. 왜 매번 이 부분에서 봐달라고 하는 거야? 어느 정도까진 네가 문제없이 완성하는 것 같은데. 선생님 기분 탓인가? 시범을 보여달라고 하는 부분이 늘 같은 것 같아서 말야."


순간 나는 뜨끔했다. 15명가량의 학생들이 '잘 모르겠어요, 이 부분 좀 다시 보여주세요' 요청하는 건 매우 흔한 일이었지만 같은 것을 묻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반복해서 질문한다는 건 유독 어려운 부분이 있거나 다른 방법을 물어보고 싶을 경우, 그것도 아니라면 그 부분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가장 마지막 경우에 해당됐다. 솔직히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잘한다 잘한다 칭찬받는 초벌에 비해 마무리 부분에 자신이 없어서였다. 어느 이상 색감을 입히고 나면 아예 손을 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생님 생각엔 망칠까 봐 겁내는 게 아닐까 싶은데- 맞니? 여기까진 무사히 잘 왔는데 그다음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니까 차라리 여기까지만 하자, 그런 마음. 근데 선생님은 미완성인 그림보다 망친 그림이 훨씬 낫다고 생각해. 어느 부분을 보완해야 할지 한 눈에 보이거든. '그냥' 완성하는 건 문제가 있겠지만, '고민'으로 완성한 그림은 어떤 경우든 의미가 있어. 그리고 '망쳤다'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이잖니? 어떤 결과가 돌아올지 모른다고. 미완성일 때보다 훨씬 더 발전해나갈 가능성이 높아. 잘 생각해봐. 다음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네 스스로 완성해보자. 할 수 있지?"


이후, 몇 배로 더 고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간 초벌에 노력을 쏟아부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하지만 내겐 그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잘 돼 가던 그림을 망쳐보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속상해보기도 하고, 어떤 게 문제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만약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입시를 치르던 날도 '망쳤다'란 느낌이 드는 순간부터 어느 한 군데도 손을 대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망친 그림이든 아니든 나는 지원한 모든 대학에 착실하게 완성시킨 그림을 제출하고 나올 수 있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살아 온 흔적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삶에 남겨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흔적이 항상 만족스럽진 않을 것이다. 밤새 이불을 뻥뻥 차게 만드는 실수를 저지르는 날도 있을 테고, 다 지우고 다시 시작하고 싶을 만큼 깊은 후회가 남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우개로 아무리 지워봐도 연필 자국이 남듯, 수채화 물감을 먹은 구불구불한 종이가 다시 매끈해질 수 없듯, 살아가는 데 있어 피할 수 없는 결과들은 생길 수밖에 없다. 항상 만족스러운 과정만을 겪는다면 좋겠지만 비록 그렇지 않은 날이 찾아오더라도 손을 떼지 말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나가야 한다. 다시 어떤 색을 골라 남은 면적을 채워갈 것인지, 최종적으로 어떤 그림을 완성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만 한다. 혹시 아는가. 잘못 칠했다, 자책했던 그 부분이 세상 단 하나뿐인 당신의 그림을 더욱 눈에 띄게 만들어줄지.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해서 성장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러니 삶이라는 도화지에 하나 둘 붓질을 채워가는 걸 두려워 말자. 붓을 내려놓지 않는 한 우리에겐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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