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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Dec 16. 2015

방황이 준 선물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데 늦은 경우란 없단다


모 여고의 누구. 이름 석자만 들어도 주변 남고생들이 다 아는 아이가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 새하얀 피부, 짙은 쌍꺼풀에 앵두 같은 입술까지. 전형적인 요즘 시대의 미인형이었던 그 아이는 나와 무척 가깝게 살았다. 반에서 절반 이상이 학교 앞 아파트 단지에 살던 그때, 그 아이와 우리 집은 딱 두 동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지리적으로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는 거리였다.


게다가 딸내미 친구라면 무조건 예쁘다 예쁘다, 맛난 음식을 잔뜩 해먹이기 좋아하시던 친구 어머님 덕에 자주 집에 놀러 가곤 했다. 중간, 기말고사가 다가오면 밤새서 공부한단 핑계로 참 자주 들락거렸다. 함께 저녁밥을 먹고 공부를 하다 스르르 잠이 오면 잠깐 쉬었다 할까, 부엌으로 가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리곤 다시 공부를 하다 새벽이 되면 깜깜한 방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서울깍쟁이 같은 외모 임에도 꾸밈이 없고 털털했다. 그런 성격 덕에 또래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높았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말하는 일진들도 틈만 나면 집적거렸지만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좋은 사이로만 지낼 뿐, 단 한 번도 나쁜 길로 샌 적은 없었다.


그렇게 사이좋게 고등학교 1학년을 보내고, 2학년에 올라갈 무렵, 친구에 대해 큰 걱정이 없으실 것 같던 어머님이 공부에 큰 재미를 못 느껴서 어떡하지, 처음으로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말씀대로 공부에 큰 재미를 느끼진 못했지만 공부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다른 데 흥미를 보였다. 누군가로부터 주목받는 게 익숙하고 좋았던 친구는 연기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더니 큰 어려움 없이 유명한 모 대학의 연극영화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길이 순탄치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나 진짜 많이 방황했잖아. 공부해라 공부해라, 엄마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는데, 그땐 그게 왜 필요한지 정말 몰랐거든. 처음엔 연기가 재밌고,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유명해지는 것에만 맹목적으로 달려들게 되고, 이 길이 정말 나한테 맞는 건지도 잘 모르겠는 거야. 더 열심히 공부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그때 처음 그 생각을 했어. 배움에 대한 아쉬움이라고 해야 되나. 갑자기 너무 크게 다가오더라고. 그래서 공부에 별 관심이 없는 학생들이나 꿈 없이 맹목적으로 공부만 하는 학생들을 보면 안타깝고 속이 상해. 내가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데."


어느 순간 유명해지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앞만 보고 달리는 데 허무함이 느껴졌다. 진짜 하고 싶은 게 뭐지, 뭘 해야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방황하고 또 방황하며 다시 자신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늦은 시기였지만 처음부터 시작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 고민의 끝엔 '연극 치료'가 있었다. 주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인데, 연극을 통해 자신도 모르던 부분을 알아가는, 그녀가 말했던 '의미 없이 맹목적으로 공부만 하는' 학생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지금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 무엇일까,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니 누군가가 나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결론에 다다랐고, 그 결론은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길로 그녀를 이끌었다.


종종 친구는 방황했던 때를 스스로 '망나니의 시기'라고 칭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친구들은 같은 것을 느꼈다. 방황이 이 친구를 정말 많이 성장시켰구나,라고. 연극 치료에 관련된 교육을 꾸준히 받고, 직접 실습도 나가보면서 하루가 다르게 밝아졌다. 이 일을 통해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 표정만 봐도 모두 전해질 정도였다. 이제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은 것 같아 기쁘지만 방황하는 동안 흘려보낸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진다고, 자신만 느리게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데 있어 늦은 경우란 없단다.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하는 데 시간 제약은 없다. 넌 변할 수 있고 혹은 지금 그대로 있을 수도 있지. 규칙은 없는 거니까. 최고가 될 수도 있고 최고로 못 할 수도 있지. 하지만 난 네가 최고로 잘하길 바란단다. 그리고 너를 자극시키는 무언가를 발견하길 바란다. 너와 다른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느껴보길 바란다.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인생을 살기를 바라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용기를 가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기를 바란다.  ㅡ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中 ]


서른을 앞둔 우린 다시 시작하는 데 있어 전보다 큰 두려움을 느낀다. 이제 대학원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그 친구도, 내년부터 새로운 환경에 뛰어들게 될 또 다른 친구도, 그리고 여전히 많은 고민에 빠져 있는 나도-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게 전보다 두렵고, 무섭다. 책임의 무게가 전보다 무거워서이기도 하고, 적지 않은 나이에 길을 잃으면 정말 막막할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나보다 4살이 많은 친언니는 네 나이만 됐어도 뭐든 해봤겠다며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매번 격려해주지만 선뜻 뛰어든다는 게 쉽지 않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용기는 줄어든다더니- 이런 경우, 저런 경우를 따져 보다 보면 방황조차 하지 못하는 지경에 놓일 것 같았다. 그냥저냥, 그렇고 그런 시간들을,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그래, 그것보다야 방황이 훨씬 낫지 않을까. 이게 맞나, 의심이 드는 순간부터 움직일 준비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물론 그 순간부터 또다시 알 수 없는 길을 향해 걷게 되겠지만, 친구의 말대로 그 시기가 망나니처럼 느껴질 만큼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건 아닌데' 생각만 품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훨씬 나을 것 같다. 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느끼게 되고, 나를 자극시키는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테니. 공부에 별 뜻이 없던 친구가 지금의 일에서 보람을 느끼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방황하지 않았더라면 친구 스스로, 자신이 그런 사람인 줄 평생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겁먹지 말아야지. 다시 새로운 세상의 문을 두드려봐야지. '방황'은 겁을 주거나 좌절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 것이다. 늘 우리에게 무언가를 줄 준비를 하고 있다. 꼭 필요했을 그 무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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