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마무리하는 소박한 다짐
전보다 많이 덤덤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연말만 되면 왠지 모를 설렘이 느껴진다. 가게 곳곳은 또 한 해가 끝나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하철역까지 걷는 10분, 항상 커다란 교회 앞 번쩍번쩍한 트리를 마주하곤 하는데, 25일이 지나자 어느새 '메리 크리스마스'가 '해피 뉴 이어'로 바뀌어 있었다. 흘러가는 시간에 맞춰 내 감정도 빨리빨리 바꿔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크리스마스니까 어서 즐겨, 이제 연말이니까 슬슬 마무리해야지, 곧 2016년인데 새해 다짐은 했어?, 거리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유독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던 한 주가 지나고 연휴의 아침이 밝았다. 아직 주말이 남아있단 사실 만으로 이불 속 보들보들한 촉감이 몇 배로 더 행복하게 느껴졌다. 미뤄뒀던 늦잠을 푹 자고 느지막이 나와 점심을 먹었다. 역삼동에 있는 대게집에 가 볼까 했지만, 결국 30가지 정도 되는 메뉴를 몽땅 꿰고 있는, 익숙한 가게에 가기로 했다. 이번에도 훈제연어와 월남쌈만 두 접시를 먹었다. 이럴 거면 쌀국수집에 갈 걸 그랬나. 아냐 아냐, 그래도 여기가 조금씩 여러 가지 맛보기 제일 좋잖아. 우린 저번과 같은 대화를 했다.
두둑이 배를 채우고 나와 근처 쇼핑몰을 한참 돌아다녔다. 다음 주부터 추워진다는 말에 히트텍 두어 벌, 원피스도 몇 벌 샀다. 이거 예쁜 거 같지 않아?라는 물음에 너 이런 거 제일 많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냐, 그건 붉은빛이고 이건 푸른빛이잖아, 달라 달라. 사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미묘한 차이였다. 똑같은데,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옷을 샀다. 이번엔 원색으로 사려고 했는데, 조금 다른 디자인으로 사보려고 했는데, 입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결국 익숙한 걸 골랐다. 뭐, 어찌 됐든 새옷이니까.
쇼핑을 마친 후, 시계를 들여다봤다. 시간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집에 잠시 들러야 할 일이 있다고 해 그동안 염색을 하고 오겠다 했다. 2개월째 뿌리 염색을 미루고 있었다. 작년이었나. 오픈 기념 할인 행사를 한다기에 들렀던 곳이 불현듯 떠올랐다. 디자이너는 개인정보를 쓱 훑어보더니 1년 만에 오셨네요,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20개가 넘는 다양한 컬러를 보여주며 어떤 색상을 원하는지 물었다. 얼마 전, 회사 동료가 했던 컬러가 생각났지만 이내 전체적으로 색감만 맞춰주세요, 했다.
"늘 이 색상으로 하시나 봐요. 고객님 피부색엔 붉은 계열이 더 잘 어울릴 텐데요."
디자이너는 염색약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전에 갔던 미용실에서도 같은 말을 했었는데.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조금 망설여졌다.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그냥 아까 그 컬러로 해주세요, 대답했다. 새카만 본래 머리 색을 약간 밝게 해주는 정도면 될 것 같았다. 1시간 30분가량,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하시는 일은요, 사는 동네는 어디예요, 익숙한 대화가 오고 갔다. 그는 염색이 끝난 후, 헤어 끝부분에 컬을 넣어주며 다음엔 붉은 계열로 꼭 한 번 해보세요, 상술이 아니라 진짜예요, 새로운 컬러에도 도전해봐야죠, 또 한 번 말했다. 네, 2달 뒤에 다시 올게요, 대답했지만 또 같은 컬러를 고르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1년 동안 쳐다도 보지 않았던 옷들을 싹 정리하고, 새 옷을 걸었다. 색상이 조금 더 선명해지고, 재질이 조금 더 빳빳해졌을 뿐, 사실 큰 차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아니면 잘 모를, 미묘한 차이였다. 연말의 설렘을 빌려 조금은 다른 시도를 해보려고 했는데. 하루를 되돌아보니 점심 메뉴와 새로 산 원피스, 헤어 컬러까지. 사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선택지에 새로운 것들이 있긴 했지만 결국 익숙한 걸 택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건 멀리하게 됐다. 나름대로 내게 맞는 것들을 잘 찾아온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변화를 줘도 괜찮긴 하겠지만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잖아. 이래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건가, 싶었다.
말끔해진 책상에 앉아 시간에 떠밀려 억지로 구입한 새 다이어리를 뜯었다. 1월 1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작년과는 조금 다른 계획들을 적었다. 헬스장 등록하기, 새로운 취미 찾기, 매년 적었던 그런 것들 말고- 나를 완전히 바꿔야 할, 혹은 내가 완전히 달라져야 할 그런 것들이 아닌 실현 가능한, 예측 가능한 것들로. 대신 어느 면에서든 올해보다 조금 더 괜찮은 내가 되기로, 소박한 바람들로 1월을 채웠다. 완전히 바꾸지 않더라도,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달라져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