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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Dec 30. 2015

동료가 건넨 도시락

누군가에게 베풀면 돼요. 그러면 돼요.


'외식녀'


회사 내에서 자주 불리는 별명이다. 매번 점심을 사 먹어서이기도 하고, 팀 사람들끼리 가깝게 지내는 터라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꿰고 있어 지어진 별명이기도 하다. 재작년 언니가 결혼한 후, 제대로 밥을 만들어 먹어본 게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마음먹고 만들어봐야 후다닥 단시간에 완성할 수 있는 유부초밥이나 김치볶음밥이 전부. 그래도 초반에는 고슬고슬 밥을 지어 1인분씩 따로 포장해 냉동 보관하기도 하고, 근처 시장에서 각종 반찬을 사다가 하나하나 통에 옮겨두기도 했는데. 보다시피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시끌시끌 다섯 식구가 모여 살다 딸랑 혼자가 되어버리니 잠깐 까먹은 사이, 음식이 몽땅 썩어버리기 일쑤였고, 간혹 혼자 밥을 먹게 되는 날은 입맛이 없어 금세 숟가락을 내려놓게 됐다. 혼자 먹는 밥이 그렇게 맛이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결국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많아져 그때그때 되는대로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아침은 패스, 점심은 회사에서, 그래, 저녁만 해결하면 되는 거다. 대개 약속을 잡아 꼭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날씨가 추워지니 한 가지 고민거리가 생겼다. 점심에 주로 외식을 하던 우리 팀이 추운 날씨를 피하기 위해 전부 도시락을 싸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밥만 싸와. 반찬은 내가 싸올게."


"아니에요. 밥은 내가 1.5배로 가져오면 되니까 그거 먹어요. 그냥 빈손으로 와도 된다니까."


"그래그래. 인원도 많은데 뭘."


다행히 팀 사람들은 모두 인심 좋은 분들이었다. 너도 나도 밥을 싸주겠다며 친절을 베풀었지만 극구 사양했다. 다 큰 어른이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신경 쓰이게 만드는 것조차 민폐인 것 같았다. 매번 저녁을 잘 챙겨 먹으니까 점심은 간단히 먹어도 돼요, 이참에 식사량 좀 줄여야죠, 대답하곤 항상 출근길에 간단히 먹을 것을 사 왔다. 어려서부터 워낙 밀가루를 좋아했던 터라 대개 빵 종류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밀가루 자주 먹으면 몸 상해, 일주일에 한두 번만 먹어, 듣기 좋은 잔소리도 해주었다. 그중에서도 동갑내기 디자이너는 유독 내 끼니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아니, 또 빵 먹어요? 밥 먹으라니까. 그러니까 맨날 머리가 아프고 속이 아프지. 내일은 내가 볶음밥 하나 더 싸올 테니까 그거 먹어요. 알겠죠?"


그녀는 늘 정감 어린 말투로 나를 살갑게 챙겼다. 회사 내에서도 싹싹하고, 예의 바르며, 다정한 사람으로 평판이 나 있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료가 이 사람이라 다행이다, 느낄 정도로 정말 따듯한 사람이었다. 홀로 서울살이를 하고 있음에도 살림을 야무지게 잘했다. 유독 추운 날, 외식하기가 꺼려지는 날이면 그녀는 꼭 두 개의 도시락을 챙겨 왔다.


볶음밥이며, 제육덮밥이며, 계란말이며, 그녀의 도시락은 시중에서 판매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맛있었다. 그녀의 손을 거치면 모든 재료가 맛깔스럽게 변했다. 한사코 거절을 해도 매번 도시락을 갖다 주는 그녀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가 챙겨준다는 것은 참 고맙고 좋은 일이었지만,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도 있었다. 어릴 적, 친구로부터 손편지를 받으면 꼭 다음 날 답장을 줘야 마음이 편하고, 지난번 저녁을 얻어먹었다면 다음엔 기필코 내가 사야 속이 시원한, 그런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 어떤 부분에서든 나의 그런 성향을 느꼈을 그녀가 하루는 이런 말을 했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강박이 심한 거 같아. 나도 주는 기쁨 좀 누려보자고요. 꼭 내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누군가에게 좋은 일 하면 되잖아요~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나중에 손슈처럼 밥 제대로 안 챙겨 먹는 사람 있음 한 번 더 들여다봐 주면 돼요. 그게 꼭 도시락을 싸주거나 그런 게 아니어도 돼. 내가 해주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부담 느낄 필요도 없고, 뭔가 나도 돌려줘야 되는데, 그런 걱정일랑 하질 말아요. 잘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받는 것도 중요해요."


그녀는 전자레인지에 따끈하게 데운 볶음밥을 건네주며 말했다. 폴폴,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아무리 익숙해지려 해도, 누군가에게 무언갈 받는 게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나는 그날, 동료가 해준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주는 사람의 기쁨도 좀 생각해달라고, 꼭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건 아니라고, 그렇게 돌려주려 노력하지 않아도 언젠가 분명 돌려줄 기회가 올 거라고.


그날 그녀와 함께 따끈한 점심을 먹으며 생각했다. 세상 참 살만 하구나. 그래, 이 맛에 세상 사는 거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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