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제 막 70일을 넘긴 아기가 내게 있다. 그 아기를 낳고 조리원에서 최선을 다해 쉬기 위해 노트북을 챙겨갔다. 둘째 아이였기에, 조리원에 머무는 시간이 마지막 자유시간이 되어줄 거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밤낮 없는 육아가 이어질 터였다.
틈나는 대로 넷플릭스를 켜서 보고 싶었던 영화와 드라마를 몰아서 봤다. 그런데 유일하게 보지 못하고 퇴소했던 작품이 있었다. <킹덤>이었다. 통상 ‘좀비물’이라 함은 깜짝 놀랄 만한 장면이 많을 테고 기괴한 소리도 많이 날 테니 혼자서 조리원 방에서 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탓이다. 무섭기도 했고 내 방 문 앞을 지날 누군가에게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 재미있다고 말로만 듣던 <킹덤>을 보게 된 건 집으로 돌아온 뒤였다. 아기들이 낮잠 자는 틈에라도 보고는 싶은데, 역시나 같은 이유―순간적인 공포를 부르는 자극적인 효과음과 괴상한 소리―로 망설이던 차였다. 소리 때문에 행여 아기들이 깰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먼저 <킹덤>을 보았던 남편이 제안했다. “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자막을 띄우고 봐봐.”
유레카! 한글 자막이 있단 말이야? 그렇게 나의 <킹덤>은 음소거 상태로 시작됐다. 소리가 없어서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잠깐 동안의 망설임은 도입부에서 눈 녹듯 사라졌다. 소리가 없고 자막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킹덤>에 사로잡혔다. 숨을 죽였고 조심스레 침을 삼켰다. 이따금 눈이 마를 때쯤 겨우 눈을 깜빡였다.
그 자막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폐쇄자막(*)이었다. 자막에는 대사 외에도 지시문이 함께 제공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소란스럽다] [까마귀 울음] [고통스러운 신음] 같은 식이다. 덕분에 나는 배우들이 숙지했을 극의 상황을 고스란히 이해하고, 온전히 녹아들 수 있었다. 인물들의 대사가 없는 공백에서 극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극 안에 남아 거기 흐르는 공기까지 감지하게 된 것이다. 지시문은 뜻밖에 유용하기도 했는데, 아주아주 작은 음량으로 듣던 것마저 [소란스럽다]가 등장하면, 잠든 아기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재빨리 음소거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란스럽다]가 등장하면 예외 없이 정말 소란스러웠다.
청각장애인의 성장과 연애를 다룬 웹툰 <Ho!>에는 영화를 보는 일화가 등장한다. 귀가 들리지 않는 ‘호’는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데, 그를 이해하기 위해 연인인 ‘원이’는 음소거 모드로 소리를 모두 제거하고 영화를 본다. 그러나 이내 멈춘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본인이 누리던 소리의 세계에 비해 소리 없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나의 <킹덤>은 아주 온전했다. 자막을 띄우고 음소거 상태로 시즌 2까지 모두 보았다. 아기들을 재우고 집안일을 마친 뒤 5분, 10분씩 시간이 날 때만 겨우겨우 이어 본 것이었음에도, 너무나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나는 배두나가 되었다 서비가 되고, 전석호가 되었다 범팔이 되었다. 음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극 안의 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지시문이 포함된 자막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킹덤>이 잘 만들어진 극이기 때문이었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온갖 자극적인 소리가 넘쳐나는 세계에서 나는 <킹덤>의 남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소리 없음이 만들어내는 두려움과 공포. 소리 없음이 만들어내는 웃음. 소리 없음이 만들어내는 긴장. 소리 없음이 만들어내는 분노. 소리 없음이 만들어내는 안타까움. 소리 없음이 만들어내는 안도감. 소리 없이도 완벽한 이 세계. 좀비물에 대해 흔히 갖고 있던 편견인 ‘깜짝 놀랄 만한 장면’이나 ‘기괴한 소리’, ‘순간적인 공포를 부르는 자극적인 효과음’으로부터 탈피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괴물들의 세계였다.
<킹덤>은 기습적인 감각의 자극보다 지천에 깔린 일상적 공포로 숨통을 조여온다. 믿는 이로부터 배신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랑하는 아이를 잃을 수도 있다는, 나라로부터 외면당하고 배고픔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삼베옷을 적신 붉은 피처럼 서서히 그러나 선명하게 스며든다. 그것이 진짜 기이함이고 두려움이다. 한 사람의 세계는 대개 그런 것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던가.
견고하게 짜인 세계에서 나는 함께 달릴 수밖에 없었다. 역병과 괴물들로부터, 일상을 잠식하는 끔찍한 소란으로부터 먼 곳으로. [소란스럽다]와 함께 잠에서 깰 수도 있는 사랑스러운 내 아기들을 지키기 위해, 여기 너머의 세계를 본다. 저기, 소리 없는 소란이 밀려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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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쇄자막: Closed Caption, 청각장애인을 위해 모든 음성 내용을 문자로 표시하는 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