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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채 Dec 28. 2020

편지 그리고 필름 사진, <윤희에게> 속 시차

긴 시간을 건너오는 것들에 대하여

이미 그런 시절이 도래했는지 모르겠지만, 내 아이들에게 이런 설명을 해줄 날이 곧 올 것 같다. “엄마가 어렸을 때는 친구가 전학을 가면 소식이 영영 끊어지는 일이 생기기도 했어. 인터넷도 안 됐고 핸드폰도 없었거든!”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할 것이다. “인친이나 페친처럼 편지로만 소통하는 친구도 있었지. 펜팔이라는 건데, 현실에서는 만난 적 없지만 편지를 주고받는 친구인 거야!” 신이 나서 말이 길어질 수도 있겠다. “좋아하는 연예인에게도 편지를 썼다고, 종이로 된 편지지에! 우표를 붙여서 숙소로 편지를 부쳤어.”


과거의 나는 상상조차 못했지만 지금의 사람들은 언제나 접속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소셜 미디어 게시글과 실시간 메신저 서비스로 쉴 새 없이 자신의 상태를 전하고 타인과 소통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늘 온라인에 연결된 상태로 존재한다. 이는 꽤나 피곤한 일이다. 상대방의 상태가 바로 확인 가능하다는 점이, 마음에 피로감을 더한다. ‘읽씹(읽고 씹는다)’, ‘안읽씹(안 읽고 씹는다)’이란 요샛말처럼 상대방의 ‘읽음 여부’까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시간 소통은 우리 시대를 영영 바꾸었다. 온종일 접속되어 상태를 확인하고 확인당할 수 있다는 것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시차는 사라졌다. 편지 한 통을 완성하기 위해 몇 날 며칠 마음을 앓던 시간, 편지를 부치기 위해 우체국에 가거나 우체통을 찾던 과정은 모두 사라졌고, 편지가 수신인에게 도달하기까지의 시간도 모두 없어졌다. 생각과 마음을 담는 시간도, 상대에게 전달하기까지의 시간도 짧아졌다. 그 사이에 존재하던 시차 역시 차츰 사라져갔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시차가 줄어들면서, 망설임도, 두려움도, 설렘도, 그리움도, 슬픔도 조금은 휘발했고 가벼워졌다. 소식을 알 수 없어 끙끙 앓던 일은, 편지를 부쳐놓고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던 일은 사라져 까마득한 과거의 일 같다. ‘읽음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던 편지를 부쳐놓고 오직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날들은 참 지난했다.



영화 〈윤희에게〉를 보고 이렇게나 말이 길어졌다. 이는 〈윤희에게〉가 편지로 움직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윤희에게 도착한 편지 한 통. 그 편지를 몰래 읽은 윤희의 딸 새봄이 편지가 발신된 곳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하며 두 사람은 일본의 작은 도시 오타루로 향한다. 눈이 새하얗게 얼어붙은 오타루에서의 여정을 통해 윤희의 마음은 조금씩 녹아내리고, 그의 비밀스러운 과거가 조금씩 드러난다.


시차. 〈윤희에게〉는 사람 사이의 시차에 관한 이야기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까지의 시간. 그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에서 시차는 편지를 매개로 선명하게 그려진다. 몇 번을 고쳐 쓰고도 부치지 못했던 편지 한 통으로부터, 누군가 그 편지를 부치러 가는 발걸음으로부터, 편지함에 그 편지가 도착하는 순간으로부터, 편지가 읽히고 혼자서 가슴 졸이는 매일매일로부터, 그리움 그리고 사랑은 쌓여 형태를 이룬다.


우리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상대의 진심을 알지 못해 전전긍긍 잠 못 이루던 밤은 얼마나 길었던가. 망설임과 그리움, 두려움과 기쁨, 안타까움과 설렘, 사랑과 사랑. 사랑! 시간이 빚은 것.


편지뿐 아니라 〈윤희에게〉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필름 사진 또한 시간차가 빚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찍자마자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 사진과 달리, 필름 사진은 찍는 때와 확인할 수 있는 때가 다르다. 어떤 사진이 찍힐지 모르지만 순간을 믿고 셔터를 눌러야 한다. 필름이 한정돼 있기에 ‘바로 지금’이라 판단되는 딱 한 순간에 마음을 맡겨야 한다. 인화해보면 울음이 날 수도, 웃음이 날 수도 있다. 붙잡고 싶던 순간을 놓쳐버려서,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움이 사진 속에 담겨서. 믿고 결정하고 기다리는 일, 그 또한 사랑이 아니던가.


긴 세월, 시간의 틈에서 윤희는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웃었을 것이다. 윤희에게는 준에게 이해받기까지의 시간이, 준을 이해하기까지의 시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두려웠겠지만 못 견디게 궁금했겠지만 윤희는 기다렸을 것이다. 스스로도 알 수 없었던 자신의 진심을, 준의 마음을 마주할 때까지.



역시나 편지를 쓰는 일은, 필름 사진을 찍는 일은 두렵다. 자신이 다 망쳐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발신을 취소할 수도 없이 상대에게 가고 있는 편지 한 통이 우리의 관계를 망칠까봐, 지나치게 깜깜하거나 밝아서 혹은 렌즈 앞에 손가락 끝이 걸려 엉망인 사진을 찍을까봐. 또한 못 견디게 궁금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편지가 잘 도착했는지, 읽기는 했을지 알 수가 없어서, 내가 담고 싶던 그 순간에 맞게 셔터를 잘 누른 것인지 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다시 편지를 쓰고, 필름 사진을 찍으며 시차를 벌리는 일에 골몰할 것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얻는 마음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기에.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훗날에 깨닫게 되는 무언가가 상대방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하기에.


읽고 안 읽고는, 답하고 답하지 않고는 그때나 지금이나 수신인의 자유다. 하지만 〈윤희에게〉를 보던 밤 나는 다시금 옛 시간을 떠올렸다. 읽고 응답하는 시간에, 마음을 주고받는 일에 좀 더 애틋해졌다. 누군가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래 망설였을 것이다. 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해 지난날을 모두 바쳤을 수도 있다. 긴 시간을 건너오는 것, 그게 사랑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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