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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Feb 13. 2018

1.성폭력 피해자를 알아볼 수 있나요?

나의 후천적 능력, sixth sense. 

내가 가진 여섯 번째 감각은 폭력 피해를 경험한 사람들, 특히 자신의 피해 경험을 꽁꽁 묶어 가슴 저편에 밀어 놓고 있는 사람들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당연히 선천적인 감각 일리는 없고,  내 나이 스물에 우연히 만난, 한 언니를 통해 각성된 능력이랄까?

당시 그 언니는 서른 살. 현재의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지만 스무 살의 나에게 그 언니는 완전한 어른처럼 느껴졌었다. 나의 무모했던, 처음이자 마지막인 지리산 등반 길에 어쩌다 만난 그녀는, 단 이틀간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벼운 미소 한 자락으로 내 안에 남아 있다. 비록 얼굴도, 목소리도, 이름도 아무것도 선명하게 남아있지 않지만 그녀의 미소 한 자락은 내 안에 하나의 진주가 되어 머물러 있다. 


2002년 나의 스무 살. 지루한 여름방학의 끝자락에서 혼자, 무모하게 시작한 지리산 등반.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밖에 하지 않는 내가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리고 왜 바로 다음날 새벽기차에 몸을 실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노고단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명의 언니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친절한 언니들은 인생 첫 등산으로 지리산을 선택한 나를 어이없어하면서도 거두어 주었다. 결국 언니들의 초콜릿과 오이를 얻어먹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하산 이후 가장 맏언니였던 그녀의 집에 가서 삼계탕까지 든든하게 얻어먹게 되었다.


며칠 만의 포식으로 배를 두드리고 있을 때 언니가 향이 진한 국화차를 내어 주었다. 작은 찻 잔에 노란 꽃송이가 몇 개 띄워져 있었고 그 향은 언니의 작은 방안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했다. 내 시선은 노란 국화잎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벽에 걸려있는 언니의 흑백 사진, 마치 연예인들의 작품 사진과 같은 그 멋진 사진으로 옮겨 갔다. 바닷가에서 밀물에 발 장난을 치고 있는, 긴치마를 입은 언니의 모습. 왠지 홀가분해 보이는 미소를 띤 사진 속의 언니는 우산을 들고 있었고 그 우산만이 흑백 속에서 선명한 빨간색을 입고 있었다.


"언니, 저 사진 뭐예요? 연예인 사진인 줄 알았어요!"

"응, 저거 내가 성폭력 극복했을 때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야. 그거 극복하느라고 8년이나 걸렸네~"

...


스무 살의 나는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해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 차라리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까? 내 표정은 완전히 얼어붙었고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국화차의 진한 향기에 내 정신이 몽롱해진 것일까...


언니는 개의치 않으시는 듯, 사과를 깎으며 말을 이어 갔다. 

"20대 초반에 성폭력을 당했는데, 그때는 그게 뭐라고 그렇게 힘들었잖아~ 그래서 그거 극복하는데 8년이나 걸렸어. 저 사진은, 아는 분이 축하한다고, 다시 행복해 진거 축하한다고 찍어주셨어. 그분이 사진 공부하는 분이거든. 참, 그 국화차, 너무 진하게 많이 마시면 살짝 멍해질 수 있다?! 알아서 조금씩 향을 즐겨봐~"


"... 네에..." 


그 뒤로도 언니는 내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의치 않고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하셨고... 난 정말 국화차의 향 때문인지 언니의 이야기 때문인지.. 무언가에 취한 듯 나 자신을 잃고 그 상황에 그저 놓여 있었다.


2002년 8월의 마지막은 그렇게...

동그란 얼굴에 빨간 립스틱을 사랑하는 서른 살의 그 언니, 언니의 흑백 사진, 사진 속의 미소, 빨간 우산, 노란 국화차, 그 진한 향기... 그리고 그 속에서 나를 잃고 주저앉아있던 스무 살의 나...

이렇게 우연들이 뭉쳐진 덩어리가 쿵. 쿵.

내 인생의 필연적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2008년 학교 기숙사.

대학 졸업 후 한동안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2008년에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고 나보다 조금 어린 친구들과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한 공간에서 지내게 된 이들과 안면을 트고자 내가 치킨을 쏘겠다며 마련한 자리. 그 자리에서 우연히 꺼낸 나의 성폭력 피해 경험.


10살 때부터 1년 반 동안, 친오빠에게 당해왔던 성폭력 피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나 스스로 침묵하고 외면해 왔던 10여 년의 시간.


2002년 8월의 그 국화차 이후,

나를 일으키고 내 목소리를 내기 위한, 쉽지만은 않았던 과정들을 꾸준히 밞아온 나이기에,

나의 성폭력 피해는 떠벌리고 다니지 않지만 숨기지도 않는 내 인생의 수많은 경험 중의 하나이기에,

난 치맥과 함께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동시에 한 친구의 표정이 얼어붙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내 얘기를 들으며 원래 하얗던 그녀의 얼굴은 더욱 하얘졌고 그녀의 눈동자는 당황, 불안, 그리고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안쓰러운 노력으로 간신히 나에게 머물러 있었다. 


'너도.. 그렇구나. 그래, 너도 그랬구나.

괜찮아, 별거 아니야. 별게 아니게 만들 수 있어. 나도 해냈듯이 너도 할 수 있어.'


마음속으로나마 그녀의 어깨를 보듬어 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똑. 똑.

그녀가 내 방에 찾아왔다.


"언니, 있잖아.. 얘기 좀 해도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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