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ortbus Mar 24. 2022

성추행 이후의 스트레스 상황

피해자가 자꾸만 "죄송"해 지는 상황

성추행 고소를 하고 약 20일이 지난 어제, 경찰서에서 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경위님이 전화를 주셨다.


"안녕하세요? OO경찰서 OOO 경위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경위님"


"음...잘 지내고 계시죠?"

"예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친절한 경위님은 나의 안부를 먼저 물어봐 주셨다. 그리고 뒤이어 스마트워치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음.. 스마트워치가 뭐예요?"

"아, 그게 지난번에 신변보호조치를 신청할지 말지 고민하셨잖아요. 스마트워치는 버튼을 누르면 바로 경찰서에 신고가 돼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거예요. 지금 일하시는 곳이나 집으로 그 피의자가 찾아가거나 위협을 하거나 할 때 바로 경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거거든요."


아하.. 그런 게 있었군:) 하지만 난 일단 신청하지 않았다. 내가 일하는 곳에는  가해자가 이 일이 알려지기를 두려워할 만한 사람들이 함께 머물고 있기 때문에 이곳으로 찾아오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고, 나의 집은, 자신의 차 네비에 기록이 있을 수는 있으나, 몇 호에 사는지... 이런 자세한 정보는 모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울만큼 배우고 법적 조력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니, 자신에게 불리할 행위를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아무튼, 경위님께서 "언제든 원할 때 신청이 가능하니까 필요할 때 언제든 이쪽으로 연락하시면 됩니다"라고 알려주시며 통화를 마쳤다.


이런 통화만으로도, '아.. 내가 도움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그런데...



이렇게 피해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라고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다음 날인 오늘, 방금 전!!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상황이 발생했다ㅜㅜ 나 남 앞에서는 거의 안 우는데..


가해자와 내가, 약 30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소속되어 있는 모임이 있다. 사적 모임은 아니고.. 함께 같은 주제로 연구도 하고 세미나도 하는 그런 모임. 지금 당장 내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모임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앞으로 연구자로서 살아가야 할 테니, 당장의 소득이나 커리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굳이 빠질 이유는 없는 모임. 그 모임이 만들어진지 약 한 달 정도 되어 그 모임의 회장님이 이제 30명이 다 모이는 단체 카톡방을 여는 것이 어떠냐고 현재의 핵심 멤버들이 있는 카톡방에 물어보셨다.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나의 두뇌회전이 멈췄다.

'아.. 그 가해자와 내가 한 (단톡방이라는) 공간에 있게 되겠구나...'

....

'어쩌지? 난 괜찮은가?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가? 대범하게? 난 강하니까?'

'아니지! 난 그 사람의 이름이 내 폰에 등록되어 있는 걸 생각만 해도 폰이 더럽혀진 것 같이 불쾌한데? 난 안 괜찮은 거 같은데?'

'나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과, 나 때문에 이 모임의 주최자가 불편해지는 거 아닌가? 그들이 나를 성가셔하지는 않을까?'

'근데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계속 있을 텐데, 이번에 피한다고 해도 언제까지 피할 수 있지? 어차피 계속 피할 수 없다면 그냥 이번에 맞닥뜨릴까? 그게 낫지 않을까?'

'아..... 어쩌지...'


이런 뒤죽박죽의 생각들이 순식간에 내 머릿속을 지배하면서 그 카톡 메시지를 보기 전에 내가 하고 있던 일, 내가 생각하던 일, 오늘 해야 할 일들이 모두 정지되어 버렸다.


모르겠다. 무엇이 현명한 길인지, 무엇이 나를 위한 길인지, 무엇이 옳은 길일인지, 무엇이 내게 이로운 길인지.


핵심 멤버들이 있는 그 단톡방에서는 "회장님이 뜻하시는 대로 하세요~"등과 같은 동의의 글들이 하나둘씩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나를 채찍질하며 나의 판단과 결정을 재촉이나 하듯이.


조금 멍하게 있다가 인터넷으로 한국여성의전화를 검색하여 성폭력 상담 전화번호를 찾았다.

다행히도 바로 상담원과 연락이 닿았다. 평소에는 워낙 바쁘셔서.. 한두 번 연결이 안 될 수도 있고 이메일로 나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는데, 오늘은 운이 좋게 바로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몇 차례 사건 진행 과정이나 법률 상담 등에 대해 문의를 하면서 남긴 내 이름과 사건 번호가 있다. 그것을 말씀드리니 상담 선생님은 빠르게 사건을 파악하시고는 지금 전화를 건 상황,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셨다.


되도록 차근차근 단톡방 개설 위기(?) 상황 설명을 하고 내가 지금 어떤 생각, 감정, 혼란이 드는지 말씀드렸다. 상담 선생님은 그런 혼란이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지금 괜찮지 않으시다... 자꾸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일 필요 없다.. 고 말씀하셨다.


안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나 자신을 또 몰아붙이고 있었다.

상담 선생님은 피해자가 단순히 듣기 좋은 말이 아닌, 옳은 말을 해 주셨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렇지만 그 행동에는 어떤 스트레스가 따를 수 있는지, 상세히 알려주셨다.


그리고는 내게 이러한 스트레스 상황이 계속되면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다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려주셨다.


첫 번째 방법은 내가 아는 정신과가 있다면, 그곳에 가서 심리상담을 받고, 먼저 결제를 하고 의료비 지원을 신청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한국여성의전화와 연계되어 있는 심리상담소를 소개받아 이용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도 상담자와 상담원 간의 라포(rapport:마음의 유대관계)가 어떻게 잘 형성되느냐에 따라 상담의 결과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씀도 해 주셨다.


그리고는 우선, 그 모임의 회장이나 책임자에게 나의 상황,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좋아질 수 있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마치 경찰서에 가서 고소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 행위만으로도 나의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듯이.. 그리고 나의 역할은 문제를 제기하고 나의 상황과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지, 그 이후의 구체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닐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고, 그것을 모임 차원에서 어떻게 할지는 모임의 책임자가 결정하는 것이고. 책임자가 받는 부담이나 어려움, 스트레스가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몫이고.


그래 맞다. 앞으로 그 모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예를 들어 내가 그 모임에서 빠질지, 아니면 그 가해자를 뺄지, 아니면 제3의 안으로 갈지는...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일단,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은 없었지만, 모임의 회장에게 나의 감정과 상황에 대해 말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만약에 그분이 "꼭 그렇게 해야겠냐..." 혹은 "좀 참으면 안 되냐..." 등의 반응을 하신다면, 그러한 스트레스 상황이 내게 온다면 그때 나는 심리상담을 받기로 했다. 우선은 그분께 나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고 상의를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회장이 단톡방을 만들기 전에 먼저 "똑똑똑" 문을 두드렸다. 


"그 단톡방 만드시는 거요... 전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방을.. 만들려고 하고 있는데.. 이 친구(명단에서 가해자 이름 지목)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네... '전 괜찮아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사실 전 괜찮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답은 없는데, 제가 빠져야 할지.. 그 사람을 빼야 할지 저도 답은 없는데요, 제가 빠져야 할까요? 제가 빠질 일은 아닌거 같은데..."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그럼 이 사람을 카톡방에서 뺄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자, 창피하게도 내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속상함의 눈물이었다. 속이 상했다. 이런 일로 내가 곤란함을 느끼는 상황이 속상했다. 

펑펑 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 앞에서 이렇게 울어본 적이... 거의 없는데. 


사실 내가 죄송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한 것은 나와 대화를 한 그 회장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나를 챙겨주는 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분을 번거롭게 해 드리는 것에 대한 미안함.. 그런 감정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내가 지금 따지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마지막 이유는 내가 "죄송하다"라는 말을 해도 내가 "죄송"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아실만한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도 상황이 이렇게 되어 아주 많이 속상하다...'라는 나의 속상함을 전하고 싶어서 그 표현을 썼다. 


"죄송할 일 아니고요, 알았어요. 어떻게 할지 생각을 좀 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화가 마무리지어졌다. 

상담 선생님이 말한 대로 이렇게 말을 한 것만으로도 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아마도 유사한 상황, 유사한 감정, 혼란, 불쾌감을 겪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오늘의 경험을 원칙으로 삼아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어려운 혼란이 온다면, 한국여성의전화에 전화를 걸어 아마도 오늘처럼 상담을 받을 것 같다:)


다행이다, 급할 때 물어볼 곳이 있어서.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다시 한번 후회되는 결정, 선택을 했을 것 같다. 괜찮은 척, 쿨한 척, 쎈 척 하면서 나 자신을 몰아붙이는 일.


오늘 배운 한 가지. 

내가 겪은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절대 아니다."


내가 겪은 일,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을, 마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 애인, 엄마가 겪은 일처럼 생각하자. 그러면 답이 쉽게 찾아질 수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성추행가해자의 이름이 뉴스에 나온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