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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Apr 06. 2022

성추행 가해자의 명예? 까짓 거 훼손하지 뭐!

때로는 법 보다 나의 자유가 앞서기도 한다.

나를 성추행한 가해자가 인터넷 뉴스에서 검색을 할 수 있는 직책을 맡은 것을 확인한 이후,

한국여성의전화에 SOS를 쳤고,

오늘 오전 10시 반경 은평구에 위치한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 방문했다.

성범죄 가해자가 정치인이거나 유명인일 때 TV 뉴스로 몇 번 본 적이 있는 건물과 입구를 보며

왠지 신기하기도 하고 친근하기도 하고...


긴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마침 내려오시던 두 분이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따뜻하게 인사해 주셨다.


제공해주신 커피와 비스킷으로 긴장을 풀면서... 사건 관련 상세한 정보와 나의 신상에 대한 정를 기입하는 조사지에 꼼꼼히 내용을 정리해 넣었다. 좀 민감할 수 있는 내용들도 최선을 다해 솔직히, 꼼꼼히 적었다.


조금 뒤 햇살이 잘 비치는 작고 깔끔한 방으로 옮겨 나를 면담해 줄 선생님을 기다렸다.

그때, 나의 왼쪽에 위치한 소박한 책장에 꽂혀있는 책에 눈이 갔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도 있었고 '강간의 역사'도 있었다. 그중, 내 눈을 끈 것을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라는 책이다.

친족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수기였다.


음... 제목 한 줄이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듯.

나의 눈물도. 그렇게 될 것이라 바라고 또 믿는다.  



두 분의 선생님과 면담을 시작했다.


가해자를 고소했을 때, 피해자로서 나의 일이 다 끝난 것처럼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었는데...

갑자기 가해자가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직책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넷으로 그것이 검색되었을 때 내가 느끼게 된 당혹감, 분노, 혼란, 두려움 등을 상세히 말씀드렸다.


가해자가 소위 '높은' 사람들과 인맥을 쌓게 되면, 당장 나의 사건에 대한 경찰 조사와 재판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거지?

가해자가 원하는 것처럼, 나중에 진짜 정치인이 된다면? 혹시 장관이나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TV에도 나오고... 그런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또 다른 피해자들이 더 많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러면 난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런 고민들을 상세히 말씀드리고 또 가장 궁금한 것 한 가지를 여쭤보았다.

가해자의 신상에 대해 누구에게, 어디까지, 어느 수준까지 얘기를 해도 되는지...

아직 법적으로 그 사람은 피의자이기에, 그리고 명예훼손이란 것이 사실을 이야기하더라도 법에 저촉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리고 나는 나의 사건이 경찰 조사에서 끝나지 않고 재판으로 갈 수 있기를 절실히 바라기에...

어떻게 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유리한지 궁금했다.


선생님들이 정답을 말씀해 주셨다. 이 정답은 나의 국선 변호사님의 답변과는 조금 달랐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나)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입니다. 

법적으로 명예훼손에 걸리더라도, 벌금이 나오더라도, 가해자가 누구인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주위에 말을 하는 것이 가져다주는 (주관적인) 이익과 명예훼손에 걸려서 벌금을 내는 것의 경중을 따져 보았을 때, 그래도 말을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겠다 싶으시면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피해자의 선택입니다."


아.... 그렇구나.

나의 선택이구나.


법이란 것이, 나라는 1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평균적 체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기성복처럼...어쩌면 나에게는 맞지 않아 나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을 깨야지.


법을 어겨서라도 얻어지는 나의 절실한, 주관적, 감정적 이익이 있다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되, 나는 나의 이익을 취해야지. 그러면 되는 거구나... 이게 나의 원칙이구나.


나의 국선 변호사님은, 당연히 법을 다루시는 전문가답게 명예훼손에 따르는 객관적 불이익을 먼저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 말씀도 일리가 있으나... 나는 나의 원칙을 따라가기로 했다.



큰 깨달음일수록 단순하다고 했던가.

오늘 큰 원칙을 배웠고 또 구체적으로 1) 어떻게 가해자가 속한 조직에 제보를 할 것인지, 2) 어떻게 한국여성의전화와 지속적으로 소통을 할 것인지, 3) 경찰서와 신경정신과에 요청해야 할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4) 앞으로 내가 관련 대화를 주변 사람들과 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5) 기록은 어떻게 남기는 것이 좋을지... 등등의 조언들을 한가득 안고 돌아왔다.


너무 많은 것을 받아 안고 돌아와서일까? 지하철에서 폰을 잃어버려서... 한 30분을 허둥지둥 거리며 폰을 찾기 위해 헤매는 조그마한 사건도 있었다. 그렇지만 뭐... 괜찮다.

나는 지금 침착함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뭐. 사람이 때로는 바보 같은 실수도 하는 거지 뭐:)



가해자의 미래의 모든 행보에 내가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 수는 없다. 그럴 가치도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언젠가는 그 사람을 마주해도, 그 사람 소식을 들어도 내 마음이 크게 타격받지 않는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현재" 나의 마음에 충실하게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야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 도출되는 결과를,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나의 마음은 가해자의 걸음걸음마다 돌부리가 되고 싶은 심정이다. 여성의 몸을 고깃덩어리 취급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렇게 하면 자기 인생이 굉장히 힘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다른 잠재적 피해자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할 것 같다.



1995년 작인 "돌로레스 클레이본(Dolores claiborne)"이란 영화가 생각났다.

부잣집의 하녀인 돌로레스는 자신의 남편이 자신의 딸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것을 알게 되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무력한 자신의 모습에 망연자실한다. 그때 평소에는 돌로레스와 앙숙처럼 지내던 여성 집주인인 베라 도노반은 그 사실을 눈치채고 돌로레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Sometimes being a bitch is all a woman's got to hold on to.”

가끔은 쌍년이 되는 것이 여성들이 의지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래. 그놈이 나를 고깃덩어리 취급했는데 뭐. 그런 놈의 명예쯤이야. 훼손하지 뭐. 그리고는 돈 열심히 벌어서 벌금 내면 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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