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경찰서에 가서 성추행 고소를 하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마음이 많이 홀가분해졌었는데...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내가 할 일이 거의 끝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라는 말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오늘 점심때 예전에 함께 일하던 분이 찾아오셔서 반가운 마음으로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또 그 가해자의 이름이 나왔다.
"그 사람 요즘 바빠. 아~주 잘 나가"
그 사람이 "잘 나가는" 방식은 인터넷 신문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접할 수도 있는, 그런 직책을 맡았다는 뜻이었다.
밥을 먹다가...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명치끝이 답답하고.. 고개를 바로 들고 있기가 힘들어졌다.
나의 상사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나도 OO자리로 추천해 줬었어요. 그런데 내가 안 한다고 했지만..."
이때 밀려오는... 섭섭함을 넘어서는 배신감.
그 감정에 바로 뒤따라서... '이 감정이 과연 정당한 감정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앞서 작성한 글에 보면, "모든 감정은 정당하다"라는 말을 내가 스스로 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또 이런 상황을 마주하고는 나의 감정의 가치를 스스로 재단하고 평가하고 있었다.
어리석게.
그저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고, 내가 나의 감정의 정당성 따위를 따지게 만든... 이런 상황을 만든 그 가해자가 나쁜 것이다. 그의 잘못이다. 그래.. 그렇다.
연예인들에게 성범죄를 당하면 이런 느낌이 들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원하지 않아도 그 사람에 대한 소식, 이름을 듣게 되는 상황. 알고 싶지 않아도 그 사람의 근황에 대해 알게 되는 상황.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 앞에서 칭찬하는 상황.
두통이 밀려왔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을 했다.
안 되겠다. 혼자서는 못 버티겠다.
한국여성의전화에 다시 이메일을 보냈다. 나 상담받고 싶다고. 이대로는 못 버티겠다고.
그런데... 한편 이런 의구심도 들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듣지 않을 때 나는 일상을 무탈하게 지낼 수 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나 소식을 들으면 내 일상은 무너진다. 그렇다면 이게... 상담을 받는다고 나아지거나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일까?'
한국여성의전화에서 내 이메일을 보고 전화를 주셨다.
가해자가 위력을 얻게 된 상황. 나는 그의 이름을 나의 일터에서도 간간히 듣게 되고, 상사에게 도움을 요청한 뒤로는 좀 상황이 나아졌지만, 이제는 인터넷 뉴스 등을 통해서 그 이름을 접하게 될 상황.
통화를 하는 내 목소리를 떨리고 있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 뜨겁고 답답한 무언가가 얼굴까지 올라왔다.
눈물이 핑.
그렇지만 나약함에서 나온 눈물은 아니었다. 내가 처한 상황이 주는 속상함. 당혹감. 분노. 뭐 이런 것들의 복합적인 덩어리.
솔직히 말씀드렸다.
"겁이 납니다. 이 사람이 권력을 얻고... 더 높은 위치에까지 올라간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도 소위 높은 사람들과 인맥을 쌓고.. 판검사 뭐 이런 사람들하고 교류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의 재판은 불리해지는 것 아닌가요? 앞으로 이 사람이 더 유명해져서 TV에도 나오고 하면... 전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하나요? 이 사람의 이름과 얼굴과 소식을 원하지 않게 계속 접하게 된다면.. 이것이 일시적인 심리상담으로 나아질 수 있는 건가요?"
한국여성의전화와 면담 일정을 잡자고 하셨다.
그리고 상담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래도 현재 스트레스가 너무 심한 것 같으니 정신과에 상담을 받는 것을 추천해 주셨다.
.....
전화를 끊고.... 당장 가장 가까운 정신과에 가서 상담 예약을 했다.
상담예약을 마치고 국선 변호사에게 연락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 있을 수 있냐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