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결과를 새벽까지 지켜보느라.. 두 시간도 채 잠을 자지 못했지만, 오전 10시에 있는 조사를 받으러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 입구에서 방문 사유를 적고, 소지품 한 가지를 맡기고는 출입증을 받고 로비로 들어갔다.
국선 변호사님을 만나기까지 로비 벤치에서 잠시 기다렸고, 변호사님을 곧 만날 수 있었다. 함께 여성청소년계 사무실로 함께 올라갔다.
나는 변호사님과 작은 방으로 들어가도록 안내받았다. 영상을 녹화할 수도 있고 음성을 녹음할 수도 있는 방이었다. 영화에서 보면 범인이 심문을 받을 때, 범인은 볼 수 없지만 밖에서는 범인을 볼 수 있는 그런 거울 같은 유리창이 있는 방이었다. 그런데 영화에서보다는 훨씬 작은 방이었다.
경위님이 이것저것 밖에서 준비하시는 동안 변호사님께 이런 저런 설명을 들었다. 내게 사건 관련해서 질문도 하셨고.. 친절하셨고 내게 공감해 주셨고 무엇보다도 내가 성추행이 일어나고 나서 바로 신고하거나 하지 않은 것을 탓하지 않으셨다. 아주 조금이라도 "~~ 그랬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등의 말씀을 하셨다면 내 기분이 더 다운되거나 힘들 수 있었을 텐데, 전혀 그런 말씀이 없으셨다. 그랬다 한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일이니까. 오히려 내가 먼저 말했다. "제가 어리석었죠. 제 오판이었습니다."
경위님이 몇 가지의 서류를 들고 들어오셨다. 나의 서명이 필요한 서류들이었다.
예를 들어, 남성에게 조사를 받는 것을 동의하는지, 어떠어떠한 권리가 있는 것에 대해 사전 고지를 받았는지, 실명으로 할지 가명으로 할지 등등. 대민 서비스 차원이자 인권보호의 차원에서 그런 절차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 작은 방에서 얘기되는 것들을 모두 녹음하는 것을 동의하고는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영상 녹화를 할 수도 있지만 변호사님이 미성년자나 장애인이 아니고서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하셨다.
경위님이 내게 우선적으로 가해자를 만나게 된 계기부터 사건이 일어난 상황, 그리고 고소를 하게 된 이유 등을 설명하게 하셔서, 미리 기억을 복기한 대로 찬찬히 말씀을 드렸다.
이후 경위님이 구체적인 내용들을 더 설명해 달라고 말씀하셨고, 예를 들어 그날 나는 어떤 옷을 입었고, 가해자는 어떤 식으로 내 몸을 만졌고 등등, 그런 내용들을 종합하여 경위님이 조서를 만들었다.
옆에서 변호사님도 무언가를 바쁘게 적고 계셨고.
어려운 일은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고, 경위님이 작성하신 내용을 출력하여 틀린 내용이 없는지 다시 확인하고, 매 장마다 일일이 나의 지장을 찍은 것. 뭐 그런 것들.
그리고 나의 사건 진행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사이트도 알려주셨다.
단 하나의 어려움?이었다면.. 아침을 먹지 않고 가서.. 배에게 꼬르륵 소리가 날까 걱정되는.. 뭐 그 정도?ㅎ
참, 조사를 받는 중 경위님이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물어보셨다. 참고인으로 연락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미리 그 사람들에게 언지를 해 두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 요즘은 보이스피싱도 많고 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경찰서라고 연락이 가면 오해하고 끊어버릴 수도 있다고.
변호사님이 말씀하시길, 경찰이 만약 불송치를 결정하거나 하면 이의제기를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사건은 빠르게 진행되지 않으니.. 아무래도 당장 구속이 필요한 사건들부터 처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나의 사건 같은 경우는 최소 1년, 더 길게는 2년 정도까지 걸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 혹시 합의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아니오. 전혀요."
변호사님이 말하길, 어떤 사람들은 가해자의 사실 인정과 진실된 사과를 받으면 용서를 하기도 해서 물어본 것이라고 하셨다.
나의 대답이 간결했던 이유는, 이미 본의 아니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기에. 그리고 이미 지고 이기고는 나의 관심 밖이기에.
그렇게 조사를 받고는 변호사님과 같이 경찰서를 나왔다. 점심이라도 같이 하고 싶었지만.. 워낙 바쁘셔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이전에 성폭력 상담소에서 말씀해 주셨던 것이, 국선 변호사나 경찰이 피해자의 생각만큼 협조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는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었는데... 다행히 아직까지 나의 변호사님과 담당 경위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친절하셨고, 배려해 주셨고, 찬찬히 조언해 주셨고, 내 탓을 하거나 아쉬움을 표현하거나 하는 언행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경찰서에서 나와서 돌아가는 길에,
나의 몇몇의 친구들, 참고인으로서 전화를 받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상황이 이러이러하니.. 혹시 경찰에서 전화가 오면 보이스피싱 아니니, 나와 나눈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얘기해 달라고. 그렇게만 해 주면 된다고. 다들 흔쾌히 ok.
또 한 명의 참고인은 가해자의 선배이자 나의 보스, 50대 중후반 남성 교수.
직접 뵙고, 말씀을 드렸다.
그분은 내가 가해자를 고소를 한 것을 모르고 계셨기 때문에.. 좀 당황하셨다.
"난 본 것도 없고.. 그날은 내가 더 취했었으니까. 그래서 중립적인 입장에서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예 그렇게 해 주시면 됩니다."
"내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오히려 더 상처를 줄까 봐 지금까지 안 물어봤는데, 증인도 증거도 없는 건데 이게 고소가 되나요?
"성범죄라는 것이 원래 증인도 증거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본의 아니게
교수님께 짜증을 내고 이런저런 부탁을 하고 했던 것이 간접적 자료로 활용된다네요. 그래서 참고
인으로 전화를 받으실 수도 있다는 겁니다. 변호사가 참고인들에게는 미리 얘기를 해 두는 것이 좋다고 해서 말씀드립니다."
"변호사가 그렇게 증거도 없는데 신고를 하고 하는 게 좋다고 해요? 실리가 있대요?"
"실리... 때로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리가 있고 없고는
제가 판단합니다. 이제 곧 무고죄도 강화시킨다 하니.. 그쪽에서 무고, 명예훼손 다 걸겠죠. 각오하고 있습니다. 전 그저 잘 못 채워진 단추를, 좀 늦었지만 이제라도 다시 제대로 채우려고요.
더 늦기 전에 "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
그리고는 한 시간쯤 뒤, 나의 보스는 내가 있는 방으로 오셨다.
일부러 한껏 밝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밥 먹으러 갑시다~!"
평범하게 따뜻한 분.
이제 나는 내가 할 일을 거의 다 했다. 경찰에서 참고인 조사하고(불필요하다 싶으면 건너뛸 수도 있고), 가해자(전문용어로는 피의자) 조사하고, 만약 진술이 상충되거나 재확인할 것이 필요하면, 내가 한 번 더 조사를 받을 필요가 있고... 그리고는 경찰이 판단하여 검찰 송치 또는 불 송치를 결정할 것이고 그때 필요한 조치를 취하면 된다.
법이란 것이 약자나 피해자 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피해자로서 내 역할을 다 하면 그것뿐.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할 때도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