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 서툰 남자, 78% 의 열정으로 그녀를 사로잡을 수 있을까?
-질소. 영어로는 Nitrogen.
-주기율표상의 원자번호 7번인 질소는 지구 대기의 78.08 퍼센트를 차지해.
-원자번호 8번인 산소가 대기의 20.95 퍼센트를 차지하니까, 주기율표상 이웃사촌 지간인 질소와 산소가 지구 대기의 99 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지.
그녀와 나의 두 번째 만남은 그녀의 집 근처 조용한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소개팅에서 첫 번째로 만나고 일주일 뒤, 퇴근하고 귀가하는 그녀를 졸라 아주 잠시 동안의 시간을 얻었다. 나는 그녀의 호감을 얻고 싶은 마음에 머릿속에 있는 지식 중 아무 말이나 쏟아놓기 시작했다. 왜 하필 그때 질소가 튀어나왔을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다급했던 걸까? 제발 그녀가 과학을 좋아해야 할 텐데.
-세 번째로 많은 공기 성분은 뭔지 알아?
나는 뽐내듯 물었지만, 그녀는 내 질문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 말 폭탄을 투하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렇다면 물은? 응?
-유식하게 에이치투오(H2O)는?
-장마철에 도무지 빨래가 마르지 않는 이유는 공기 중에 물이 많기 때문에 그런 거 아냐?
-한여름에 습기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혀 죽을 지경인 것을 보면 질소만큼은 아니어도 적어도 산소만큼은 있는 것 같은데? 안 그래?
-아까 그 숫자들 정확한 거 맞아? 소수점 아래 두 자리까지 말하면 정확해 보일까 봐 그냥 아무 숫자나 대충 말한 거 아냐?
-세상에, 물은 왜 빼느냔 말이야?
-질소랑 산소를 제외하면 물이 공기 중에 1 퍼센트도 안 된다고?
-대체,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란 말이야?
-여름에 내가 흘린 땀만 증발해도 금방 1 퍼센트는 채우겠다. 오빠도 여름에 땀 많이 흘리지? 그럼 우리 둘이 합쳐도 2 퍼센트가 넘는데? 이게 말이 돼?
-으응?
둘이서 2 퍼센트? 공기의 무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겁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지만 분위기상 그럴 수 없었다. 공기의 무게는 1 세제곱미터에 1.29 kg이나 나간다고. 우리 둘이 운동해서 1.29 kg의 땀을 흘리면 아마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너와 함께라면 내가 1 kg 정도는 어떻게든 흘려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말이야. 아니, 지금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지. 애초에 내가 계획했던 대화 방향과 거리가 멀어졌다. 세 번째로 많은 성분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그녀의 예상 답변은 ‘모른다’이었다. 그럼 나는 의기양양하게 아르곤이 0.93 퍼센트로 세 번째로 많은 기체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리고는 나는 종종 실험을 할 때 액체질소를 쓰는데, 자연스럽게 영화 터미네이터 2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액체 인간이 액체질소에 빠져 얼었다가 터미네이터가 쏜 총에 맞고 깨져버리는 장면을 기억하냐고. 액체질소 온도가 몇 도인 줄 알아? 계획대로라면 이게 내 다음 물음이었을 텐데. 모두 어긋나 버렸다. 머릿속에 미리 세운 계획들과 갑자기 쳐들어온 물은 도대체 왜 빠진 거지, 하는 생각들이 혼재되어 당황한 나머지 앞뒤가 다 잘린 뜬금없는 말이 나와 버렸다.
-액체질소가 몇 도인 줄 알아?
아아악, 이건 아닌데. 갑자기 웬 액체질소? 그녀는 지금 공기 중에 물이 얼마나 있는지에 대해서 묻고 있잖아. 다 틀렸다. 이래 가지고는 내가 자기 얘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자들은 자기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하다던데.
-액체질소? 어, 어, 그 뭐냐.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그것 말이지? 마지막에 액체 인간을 순식간에 얼려버리는 그거. 나도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그 장면 보면서 도대체 액체질소가 몇 도 길래 저렇게 얼어버리나 궁금했었는데.
-아이스크림보다는 차갑겠지? 잘못 먹으면 내 혀도 얼어서 깨져버리나?
-혀가 깨지면 키스도 못하겠네. 그럼 난 안 되겠다. 액체질소는 사양할게.
액체질소는 사양이라니. 나는 그녀에게 액체질소를 주려고 이 말을 꺼낸 게 아니다. 나는 단지 액체질소가 섭씨 -196도라는 지식을 뽐내며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날 우리의 대화는 대체로 엇갈렸지만, 전혀 통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녀와 헤어져 돌아가는 길에 액체질소 얘기를 꺼낸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자평했다. 아마도 그녀는 키스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흐흐. 촉촉한 그녀의 입술은 그럴 자격이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한 가지 진전이 더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는 것이다. 그녀와 나의 거리가 더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언젠가 그녀에게 뽀얀 수증기를 내뿜으며 부글부글 끓고 있는 액체질소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 안개를 걷히고 나면 너를 향한 내 마음도 그렇다고.
내가 지나치게 금방 사랑에 빠진 것 아니냐는 비난은 사양하겠다. 작년, 그러니까 석사 2년 차에 내 소개팅 전적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은 못 할 것이다. 그야말로 10전 10패. 거의 매달 소개팅을 한 꼴이지만,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 선배들이 소개팅녀에게는 무조건 석사만 마치고 취직을 할 거라고 말해야 한다고 조언해주었다. 그렇지만, 솔직한 나의 성격 탓에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박사 과정에 진학해서 학문의 길을 걷겠다는 나의 의지를 결코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질문은 어떤 연구를 하느냐는 내 기대와는 달리 박사 과정은 몇 년 동안 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나는 빠르면 4년 늦으면 6년이라고 대답을 한다. 선배들은 돈도 못 버는 박사과정 학생과 연애할 여자들은 세상에 별로 없다는 걸 이미 몸소 겪어 알고 있었다. 석사 학위를 무사히 마치고 박사 1년 차에 접어든 이상 연애 문제에 있어서는 차갑고, 어두운 터널의 출발점에 들어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느새 나 자신도 이전엔 겪어본 적 없는 어처구니없는 이 소개팅 전적을 합리화하고 있었으나, 어떻게든 연애를 해보겠다는 나의 정신자세는 애프터 신청으로 표출됐다. 그러기에 앞서 호감이 가는 사람에게만 애프터를 신청하는 것이 예의 아니겠느냐, 하고 물을 수 있겠지만 무조건적인 호감이 생기는 것을 나도 어찔할 수 없었다. 이것은 될 때까지 가보려는 오기인가? 아니면 정녕 호감인가?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고, 생각할 무렵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오직 그녀만이, 내게 박사과정을 몇 년 동안 한다고 묻지 않았다. 때 묻지 않은 이 순수함. 이번 판은 뭔가 다르다. 고스톱을 치다가 열 판을 내리 잃어본 적이 있는가? 그러면 다음 판엔 못 먹어도 고다.
그녀는 객관적으로 예뻤다. 첫 만남에서 그녀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 내 소개팅 상대가 제발 그녀이길 간절히 기도했다. 아직 여름인지 가을이 시작됐는지 헷갈리는 계절인데, 나는 다시 봄이 온 줄 알았다. 그녀는 마치 긴긴 겨울이 끝나고 이제 좀 따뜻해지려나 보다 할 때 피어나는 새하얀 목련 같았다. 잎도 나지 않은 무미건조한 나무줄기에서 그렇게나 예쁜 꽃이 피어날 수 있다니 자연의 섭리는 정말 놀랍지 않은가? 그날 그녀가 입은 검은색 치마나 희읍스름한 블라우스 같은 무채색 줄기에서 목련같이 하얗고 예쁜 얼굴이 피어날 수 있다니.
아, 금방 헤어졌는데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
⌜집에 잘 들어갔니? 이번 일요일에 바쁘니? 같이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
집에 들어온 나는 가방을 멘 채 떨리는 손으로 세 번째 만남을 잡기 위해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그녀에게 곧바로 답장이 왔다.
⌜이번 주말엔 친구랑 약속 있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 토요일에 만나자고 했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지?
⌜친구랑 늦게까지 만나니? 너희 집 근처에서 잠깐 만나서 얘기나 할까? 친구랑 헤어지고 연락 주면 내가 갈게.⌟
⌜그래? 알았어.⌟
⌜오케이. 잘 자.⌟
약속을 잡았다. 이렇게 쉽게 약속이 잡히다니. 그녀도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게 틀림없다. 너무 좋아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동안 휴대폰 속 그녀의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일요일이 오기 전에 이발을 하러 가야겠다고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동네에 있는 단골 미용실에 갔더니 아줌마 한 명이 염색을 하고 있었고, 남자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미용사가 꽤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말하자 나는 투덜대며 발길을 돌렸다. 토요일 아침부터 왜 이리 붐비지? 다른 골목으로 돌아서 마침 사람이 없는 미용실로 들어갔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미용사는 의자에 앉아 재방송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재빨리 리모컨으로 볼륨을 줄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커트하실 거죠? 여기 앉으세요.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커트하신 지 한 달 정도 됐나요?
미용사는 내 머리를 슬쩍 만지더니 물었다. 나는 딱히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추구할 만큼 용감하지 않다.
-네, 한 달 전으로 되돌려 주세요.
미용사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분무기로 머리에 물을 뿌렸다. 빗으로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 안경을 벗은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부옇게 흐려 보였다. 이발을 할 때마다 익숙한 상황이지만, 오늘만큼은 거울 속 내 모습이 무척 궁금했다. 새로운 미용사가 잘 깎겠지? 잘 깎아야 할 텐데.
머리를 다 깎고, 샴푸를 하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린 후 다시 안경을 썼을 때 거울에 비춘 내 모습에 나는 당황했다. 아니, 미용사 주제에 사람 머리카락 자라는 속도를 그렇게 모른단 말인가? 내가 한 달 전으로 되돌려 달라고 그랬지, 10 년 전 고등학생으로 되돌려 달라고 그러지 않았는데? 나는 돈을 지불하며 미용사에게 조금 짧은 것 같다고 말했다.
-왜요. 어려 보이고 좋은데.
-손님은 이마가 좁은 편이라 앞머리를 짧게 해서 이마가 넓어 보이게 해야 잘 어울려요.
정말 그런가? 나는 거울을 한 번 더 들여다봤다. 왠지 미용사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지만 짧은 머리가 영 어색해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용실을 나왔다.
할 일 없는 토요일에 으레 그렇듯이 학교 연구실에 갔다. 연구실에서도 딱히 급한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왠지 할 일도 없는데 연구실에 안 나가면 죄를 짓는 기분이 든다. 점심때가 다 되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박사 과정 선배 한 명이 책상에 앉아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에게 소개팅에 나가면 무조건 석사만 마치고 취직할 거라고 말하라던 그 선배였다. 박사 4년 차가 되도록 여자 친구가 없는 그 선배는 박사 졸업하면 여자 친구부터 사귈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선배를 지나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흘끗 눈을 돌려 본 선배의 모니터에는 뭔지 모를 웹툰이 떠 있었다. 잠시 후, 마우스 스크롤 소리가 멈추더니, 선배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밥 먹었냐? 밥 먹으러 가자.
-아뇨. 아직.
-공대 식당은 오늘 메뉴가 뭐냐?
-어디 보자. 김치찌개랑 소시지 계란부침, 도토리묵무침, 뭐 이런 건데요?
-또? 지난주 토요일에도 그랬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그나저나 너 머리 깎았냐?
-네.
-왜?
-그냥요.
아직 그녀에 대해서 밝힐 단계가 아니다. 연구실에는 나중에 그녀와 잘 되고 나서 밝혀도 괜찮을 것이다.
-야, 대학원생이 머리 깎을 때는 말이다. 앞머리가 눈을 찔러서 도저히 현미경을 보기 어려울 때 깎는 거야. 나처럼. 그때가 아니면 다 과소비야. 알아?
앞서 사무실을 나가는 선배의 덥수룩한 뒷머리를 보며 그래도 오늘 머리를 깎은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언제 그녀에게 문자가 올까 온종일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친구를 만나는 걸까? 친구랑 만나서 뭐하지? 밥 먹거나, 차 마시거나 그러나? 지난번에 그녀와 주고받은 문자를 읽고 또 읽으며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예쁜 얼굴에 약간 백치미가 있단 말이야. 나는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했다. 목련 같은 그녀가 카페에 앉아 있는 나를 찾아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을 때, 그녀는 약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늦어서 조금 뛰었더니, 숨이 차네요.
-아, 네.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차는 뭐 드시겠어요? 제가 사 올게요.
-아, 그럼 저는 핫쵸코 차가운 걸로요.
핫쵸코 차가운 거? 핫쵸코가 어떻게 차가울 수가 있지? 섭씨 몇 도 이상이면 뜨겁고, 이하이면 차가운 건지 나를 시험하는 건가? 핫쵸코가 너무 뜨거우니, 조금 식혀서 갖다 달라는 건가?
근심에 빠진 나는 주문 카운터에서 그녀가 말한 그대로 말했다.
-핫쵸코 차가운 거 두 잔이요.
-네, 아이스 쵸코 두 잔이요. 다른 거 더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아니요.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후, 음료를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음료에 꽂힌 빨대로 얼음을 휘휘 젖더니, 한 모금을 마셨다.
-아, 맛있다. 저는 땀을 조금 흘리면 차갑고 단 것이 당기더라고요. 이럴 땐 역시 핫쵸코 차가운 게 짱이에요.
핫쵸코 차가운 거. 그녀에게 그 말에 담긴 열역학적인 모순에 대해 설명해주고 싶었으나, 꾹 참기로 했다. 볼츠만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도저히 풀 수 없는 난제임에 틀림없으리라.
-핫쵸코 차가운 거, 정말 맛있네요.
나도 빨대로 한 모금 쭉 빨아 마신 후, 입 안에 맴도는 달달함을 음미하며 말했다.
드디어 지루한 토요일 하루가 지나고, 그녀와 만나기로 한 일요일이 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언제쯤 그녀에게 연락을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하다가 오후 세 시쯤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친구와 몇 시에 어디에서 만나고 헤어질는지 전혀 감이 없었기 때문에 적당한 시각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오전에 연락하는 것은 우리의 만남을 너무 채근하는 것 같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오전 내내 그녀에게 연락해서 오늘의 만남을 빨리 확정 짓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이럴 땐 몸이 바빠지는 게 상책이다. 일요일 아침, 간간이 집안에 누군가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가족들 모두 각자의 방에서 꾸물거리고 있을 시각이었다. 나는 오늘 입고 나갈 옷을 다릴 요량으로 거실 귀퉁이에 있는 다리미를 몰래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특히 누나에게 들킬까 봐 숨을 죽이며 움직였다. 누나는 평소에 안 하던 짓 한다고 꼬치꼬치 캐물을 게 분명하다. 내가 아무리 거짓말로 둘러댄다고 할지라도 눈치 9단에, 연애 경력이 화려한 누나에게 통할 리 없을 것이다. 그러면 엄마 귀에도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고 앞으로 가족들의 질문공세에 시달릴 것이 분명하다. 아, 생각만 해도 괴롭다. 얼른 다리고 다시 가져다 놔야지.
한창 다리미가 스팀을 내뿜으며 내 옷을 누르고 있을 때, 누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 다리미 여기 있냐?
젠장, 이 순간 내가 가장 상종하기 싫은 인간이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데.
-너 연애하냐?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아니, 그냥.
-그냥은 무슨. 딱 봐도 오늘 소개팅하는데?
-아니. 오늘부터 나도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됐고. 나도 써야 하니까 다 쓰고 내방으로 배달 좀 해라.
-오늘 소개팅하나 봐?
아, 그냥 여기서 ‘알았어’, 하고 대화를 마쳤어야 했다. 놀려줄 심산으로 날린 짧은 공습에 길고 긴 역습을 당했다.
-야, 옷 다려 입는다고 여자가 좋아할 것 같냐?
-그럼 세탁소집 아들은 완전 인기 짱이겠네.
-얼굴은 어쩔 건데?
-푸하하. 머리는 왜 그렇게 짧게 했냐? 네가 무슨 중딩이냐?
-내가 이마가 좁아서...
-헤어스타일이 첫인상에 얼마나 중요한 건지도 모르면서.
-내가 너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 보면 한숨이 나오면서도, 이건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라고 마음먹고 그냥 포기했어. 그래도 살다 보면 그런 거 눈감아 줄 수 있는 여자 한 명은 나오지 않겠어?
-동생, 오늘 파이팅해봐. 혹시 알아? 풋.
자기 할 말만 속사포처럼 쏟아내고는 휙 돌아 방문을 닫고 나가는 누나에게, 나는 ‘앞으로 노크나 하고 들어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큰 목소리에 패배감을 감추고 싶었으나, 누나와의 입씨름은 늘 당해낼 수 없었다. 나는 다림질을 마치고 다리미를 본래 있던 거실 귀퉁이에 가져다 놓았다.
세 시를 조금 넘긴 시각, ‘오늘 몇 시에 만날까?’ 하고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을 때, 답이 없었다. 네 시가 넘도록 내 문자를 읽지도 않았고, 답도 오지 않았다. 그녀가 영화를 보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영화관에서 눈치 없이 휴대폰을 켜면 옆, 뒷사람에게 실례이지 않은가? 그녀가 그 정도 예의는 있겠지? 하지만 다섯 시가 넘어서도 연락이 오지 않자,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 정도면 영화가 끝났을 텐데. 무슨 일이 있나? 이제 전화를 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오늘 만남을 일방적으로 독촉하는 것 같아서 망설였다. 여섯 시가 되었을 때, 나의 인내심은 무너졌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다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럴 수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거나, 나와 만나기로 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 어쩌지?
-오빠가 여기 웬일이야?
내가 그녀를 만난 시각은 밤 9시가 다 된 시각, 그녀가 사는 동네를 배회한 지 한 시간 만이었다.
-응, 문자를 보내도 전화를 해도 답이 없어서. 우리 오늘 만나기로 했잖아.
-미안. 아직 못 봤어. 오늘은 기분이 별로라서 전화기 꺼놨어.
-무슨 일 있었니?
-응, 아니. 많이 기다렸어?
-뭐, 그냥. 저번에 그 카페에 가서 핫쵸코 차가운 거나 마실까? 밤인데도 날씨가 아직 덥네.
-아니 오빠.
그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오늘은 맥주가 마시고 싶어. 저기 골목으로 꺾어지면 편의점 하나 있는데, 그 앞에서 맥주나 한 캔 하자.
-그래.
그래도 다행이다. 편의점에 다다르자, 그녀를 파라솔 의자에 앉게 하고, 나는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안에는 알바로 보이는 젊은 남자 한 명이 가게를 지키고 있을 뿐, 손님은 없었다. 맥주가 있는 냉장고로 다가가니, 네 개에 만원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적당히 네 개를 고른 다음, 감자칩 한 봉지와 육포를 계산대에 올려놨다. 계산을 하고 나오니, 그 사이 그녀는 휴대폰을 다시 켜서 보고 있었다. 내가 맥주와 안주를 테이블에 올려놓는 동안에도 계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네 개 중에 어떤 맥주를 마시고 싶은지 묻는 대신 손에 잡히는 맥주 한 개를 그녀 앞에 놓았다. 그제야, 그녀가 휴대폰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내가 안주로 사 온 육포 포장을 벗기는 사이, 그녀는 테이블 세팅을 도우려는 듯 감자칩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양손에 힘을 주어 과자 봉지를 뜯었을 때, 손에 준 힘의 균형을 잃었는지 봉지가 크게 흔들리며 안의 내용물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울음을 쏟아냈다. 감자칩을 좀 흘린 게 울 일인가 싶어, 나는 당황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멋쩍었는지, 금방 울음을 그치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했다.
-남자들은 다 이 질소 포장 과자 같아.
-빵빵하게 뭔가 잔뜩 가지고 있는 것처럼 으스대기나 하고.
-정작 안에 가진 것도 별로 없으면서.
-처음 시작할 때에는 말만 풍선처럼 부풀리고, 겉치레만 그럴싸하게 하고.
-딱 이 감자칩 같아.
아침부터 다림질하느라 부산을 떨었던 나는 뜨끔했다.
-정작 여자들이 바라는 것은 나 하나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건데.
-그 진심은 너무나 적어.
-한번 봉지를 뜯고 나면, 그냥 공기처럼 다 사라져 버려.
그녀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딱히 생각나지도 않았다. 순간 아까 편의점 안에서 집어 들었던 기네스 맥주 캔이 보였다.
-혹시 기네스 좋아하니?
-여기 기네스 캔에는 위젯이라고 하는 탁구공 같은 플라스틱 공이 들어 있는데.
-다 마시고, 흔들어 보면 무슨 소리가 들릴 거야.
-캔을 따서 압력이 낮아지면 그 안에 있는 질소가 맥주로 흘러나와서 맥주 맛을 아주 부드럽게 하거든.
나는 기네스 캔을 따서 그녀에게 주었다.
-한번 마셔봐.
-흑맥주인데도 다른 맥주보다 더 부드럽지?
-응
그녀가 홀짝이며 말했다.
-다른 맥주들은 주로 이산화탄소가 녹아 있는데, 기네스는 질소가 녹아 있거든.
-그 탁구공이 캔을 딸 때까지 질소를 품고 있는 거야.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낼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거지.
-평소엔 별 볼일 없다가도 꼭 필요한 순간에 자신을 내던지는 거지.
-세상엔 그런 남자도 있어.
거기에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나도 너한테 그런 남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네스만 홀짝이고 있었다.
-오빠, 지금 고백한 거?
-응? 아니. 응.
-훗. 아, 미안.
-오빠, 멋있네.
-뭘.
그녀의 칭찬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오빠는 내가 좋아?
-응.
나는 뭔가 잘되어가는 분위기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빠 말 들으니까 나도 오빠가 좋아지려고 그런다.
-그런데, 아직이야.
-아직이라니?
-저번에 오빠가 질소가 몇 퍼센트라고 그랬지?
-응?
-아니, 공기 중에 질소가 몇 퍼센트냐고.
-78.08 퍼센트
-그래. 딱 거기까지야. 오빠가 날 좋아하는 마음은. 그 이상은 아직은 좀 부담스러워.
-내 마음은 산소 정도까지는 키워볼게.
-질소가 많아지면 그만큼 산소가 줄어드는 거고. 그럼 우리는 질식하는 거야. 알지?
-명심할게.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사온 맥주를 두 캔씩 모두 마셨다. 얼마 남지 않은 감자칩과 함께. 나는 오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끝까지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지, 그녀와의 관계가 이렇게 진척될 수 있었던 상황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날 때, 취기가 돌았는지 테이블을 잡았다. 그녀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이 정도는 78.08 퍼센트 안쪽이겠지? 내 고집에 그녀는 내 팔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나는 하늘 위를 걷는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집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그녀는 천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오빠, 보통 박사과정은 몇 년 정도 해?
-응. 보통은 4, 5년 하는데, 나는 지도 교수님이 총애하셔서 아마 일찍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아. 한 3년? 나 이래 봬도 연구 되게 잘해.
나는 기분 좋은 마음에 조금 과장해서 말하긴 했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흠.
-끝-
이 소설은 아직 미숙한 청춘 남녀가 관계를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까지를 그려내려고 했습니다.
질소는 남자 주인공을 은유로 표현하는 수단이었어요.
남자의 열정이 너무 앞서서 관계의 일정 비율 (질소 78 퍼센트)를 넘어서면 자칫 관계를 망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공기 중 산소의 비율을 침범해서 질식한다고 생각했죠.
기네스의 위젯은 관계의 시작을 위해서는 그런 순간도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