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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좋아 Nov 08. 2024

기억의 조각

어릴 적 가진 기억의 한 조각 덕분에 목숨을 구한 한 남자의 이야기.

1. 프롤로그

인천공항을 출발한 열차가 서울역에 다다르며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열차가 완전히 멈추고 문이 열리자 하나둘 짐을 챙긴 승객들이 객차를 빠져나갔다. 그중 절반 정도는 외국 관광객이었다. 친구끼리, 연인끼리, 혹은 가족끼리 한국을 찾은 그들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이제 막 서울 땅에 디딘 첫발이 절로 흥겹다. 제일 마지막으로 검은색 캐리어를 끈 중년의 남자가 내렸다. 편안한 복장인 다른 승객들과 달리 그는 정장 차림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그를 보면 누군가는 사업차 외국에 다녀오는 비즈니스맨을 떠올릴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공무를 수행하는 고위직 공무원을 떠올릴 만하다. 그는 천천히 서울역 대합실로 걸어 들어가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목표지점을 찾았는지 발길을 틀어 대합실 한쪽 곁으로 향했다. 그가 들어간 곳은 흔하디 흔한 빵가게 체인점이었다. 평일 낮이었지만 이리저리 빵을 고르고 계산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 사이에서 한참 동안 전시된 빵들을 둘러보던 그는 무엇을 사야 할지 몰랐다. 한 여자 점원이 그에게 다가가 무슨 빵을 고르는지 물었다. 노인들이 좋아하는 빵이 뭔가요? 그가 물었다. 점원은 몇 가지 빵을 추천하였고, 그는 점원이 추천한 빵을 모두 다 샀다. 계산을 하면서 후텁지근해진 목덜미를 식히려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가게를 나오며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서 빵을 샀던 적이 있었는지 떠올려봤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캐리어와 빵이 든 비닐봉지를 든 채로 서울을 떠나는 무궁화호 열차에 올라탔다. 예약한 좌석을 찾아 머리 위 선반에 짐을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열차가 출발하자 휴대폰으로 아내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도착했는데, 회사에 일이 생겨서 내일 들어갈게.

그는 아내의 답문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등받이에 몸을 밀착시키고 눈을 감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작은 기차역을 생각하고 있었다.


2. 일본어

젊은 시절, 그는 일본말을 능숙하게 했다.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리 일본어를 잘하냐고 회사 동료가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망설이다가 사랑의 힘이라고 에둘러 말했다. 그 말에 동료는 그가 소싯적에 일본 여자랑 사귀었던 거냐고 물었으나,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동료는 그의 어정쩡한 태도를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회사는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주요 외국어 능력은 필수적이었고, 그의 동료가 발설한 이야기를 듣고 다른 동료들은 너도나도 외국인 애인을 찾아봐야겠다면서 야단을 피웠다. 어쨌거나 출중한 일본어 실력 덕분에 그는 해외 출장이 잦았다. 당시 그의 회사에는 일본에서 활동할 일이 많았는데 그에게 맡기는 일이 점차 늘어났고, 그는 미션을 하나둘 완료해가면서 경험을 키워나갔다. 모두 그가 결혼하기 전 일이니 벌써 10년도 넘은 옛날이야기다. 그 사이는 그가 하던 일들은 새로 들어온 젊은 직원들이 맡게 되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영어 외에 제2 외국어 하나씩은 입에 장착하고 입사했는데, 일본어뿐 아니라,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심지어 이들 모두를 능수능란하게 말하는 직원도 있었다. 그는 충분히 쌓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외국어에 능통한 젊은 직원들의 일을 지휘하는 팀장이 되었다. 최첨단 IT기기의 발달로 사무실에 앉아서도 각국에 출장 간 직원들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예전보다 몸은 편해졌지만,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민첩하게 명령을 내려야 했기 때문에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의 아내는 차라리 그가 출장을 자주 다니던 시절을 그리워하리만큼 날 선 그의 모습을 낯설어했다. 이 일을 그만큼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것을 회사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높은 연봉을 받았고, 꼬박꼬박 갖다 바치는 돈 앞에서 그의 아내는 군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낯섦을 무관심으로 중화시켜 버리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도 그런 아내가 낯설었으나,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집안에서는 시간이 빠르게 그러나 조용하게 흘러갔다.


3. 털보

그가 오랜만에 현장에 나갔다. 지난주에 이스라엘에서 걸려온 털보의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털보는 지난날 그가 중동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알게 된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요원이었다. 그가 안부 인사를 하려던 새도 없이, 털보는 다짜고짜 임진철이 독일에 나타났다고 알렸다. 위조여권으로 들어왔으나 사진을 대조한 결과 임진철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는 임진철이 독일에 들어온 것을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정보가 확실한 것인지 묻는 말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독일로 날아올 건지 말 건지 다그치는 말뿐이었다. 자세한 것은 만나서 얘기해 주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전화를 끊었다. 

‘하여튼 성질머리 하고는. 새끼, 하나도 안 바뀌었군.’

임진철은 북한에서 개발한 무기를 해외 테러 조직이나 독립을 원하는 소수 민족들과 밀거래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좀처럼 꼬리를 밟기 힘들었다. 그는 이스라엘 첩보기관이 임진철과 팔레스타인 간의 무기 밀거래를 주시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독일에 나타난 이가 정말 임진철이라면, 그가 다시 수면 위로 나타나길 기다리던 각국 첩보기관의 레이더가 5년 만에 제대로 동작한 것이다. 5년 전, 그는 독자적인 정보력으로 임진철이 이집트에서 활동하는 것을 알아내고 접근을 시도하다 결국 놓쳐버리고 말았다. 얻은 것이라고는 고작 멀리서 찍은, 그것도 모래바람 때문에 부옇게 흐린 그의 사진 몇 장뿐이었다. 사라진 임진철의 행로를 좇다가 다급해진 그는 급히 털보에게 연락했다. 털보는 이집트라면 자신들의 앞마당인데 미리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며 노발대발하며 성토했다. 팔레스타인과 가까운 이집트에 임진철이 왔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에겐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털보가 화를 내는 것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털보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임진철의 사진 몇 장을 털보에게 넘겼다. 5년 만에 다시 나타난 임진철이 독일에서 누구를 만나는지 알아내기 위해, 독일, 이스라엘, 한국이 공조하기로 했다. 회사에서는 멀리서나마 임진철을 직접 본 적이 있는 그를 직접 현장에 보내기로 했다.


4. 시나리오

독일에서는 임진철을 아직 요주의 인물로 점찍어 놓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의 접선책이 누구인지 밝혀내고, 팔레스타인과의 무기 밀거래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작전을 주도하고 싶어 했다. 한국 측에서는 임진철을 심문해서 북한의 무기 개발 동향과 밀거래 루트를 파악하고 싶었으나, 외교적 문제로 불거질 가능성이 있어 독일 측에서 난색을 표했다. 이런 사항들을 반영해서 그는 털보와 함께 독일로 넘어가기 전에 개략적인 작전 시나리오를 짰다. 작전의 범위는 임진철이 독일 내에서 누구와 접선하는지,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한정했다. 그는 털보와 함께 임진철에게 다가가는 접근 조를 맡기로 하고, 독일 측에는 주변 경계를 맡기로 했다. 현장에 투입되는 것은 오랜만이기 때문에 그는 가장 안전하게 위장할 수 있는 일본인 사업가로 변신하기로 했다. 상부에 시나리오를 넘기자, 곧 그의 사진이 박힌 일본 여권이 나왔다. 그가 새로 얻은 이름은 아베 신이치였다. 그는 여권의 사본과 시나리오를 미리 독일과 이스라엘 측에 보냈다. 양측으로부터 회신을 받은 그는 이튿날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경유해서 독일 베를린으로 향했다. 텔아비브에서 바꿔 탄 베를린행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 옆 좌석에는 예정대로 털보가 앉아 있었다. 덥수룩하게 코와 입가를 덮은 수염은 그대로였지만, 의자에 앉은 모양새를 보니 예전보다 배가 조금 나온 것 같다고 느꼈다. 그처럼 현장을 누비던 일은 점차 젊은 요원들에게 맡기고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는 오랜만에 본 털보가 반가웠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털보도 신문을 읽는 척하며, 그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Hello.” (헬로.)

비행기 옆 좌석에 앉은 난생처음 본 사람에게 귀찮지만 으레 던지는 건조한 인사말처럼 들렸다. 그는 털보의 인사에 가볍게 목례만 했다. 그들은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일정 고도에 이른 비행기가 수평으로 날기 시작하자 보고 있던 신문을 덮으며 털보가 먼저 말을 건넸다. 

“Lim Jinchul is known to stay in Berlin.” (임진철은 베를린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How did you find out Lim is in Berlin?” (임진철이 베를린에 있는지 어떻게 알았지?)

“We have some connections to the German intelligence agency. Lim’s pictures you gave me 5 years ago were used to identify him. That’s why we include you in this operation. You’re the only one who had seen him. (우리는 독일 정보국과 연줄이 좀 있다. 네가 5년 전에 준 임진철의 사진으로 그를 확인했지. 그래서 너를 이번 작전에 포함시키는 거다. 그를 직접 본 유일한 사람이니까.)

“Okay. But I didn't know Israel and Germany are cooperating in spite of that terrible... ” (그래. 하지만 나는 그 끔찍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독일이 협력하고 있는지 몰랐네.)

그는 뒷말을 생략했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한 독일과 협력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의아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눈치가 빠른 털보가 엄지와 검지로 양 입가의 털을 매만지며 말했다. 

“Past is past.” (과거는 과거일 뿐.)

승무원이 음료를 서빙하기 위해 두 사람에게 다가와서 둘 사이의 대화가 끊겼다. 털보는 오렌지 주스를 시켰고, 그는 물을 달라고 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그는 등받이를 뒤로 최대한 젖히고 누웠다. 졸음이 몰려와서 한국은 지금 밤인가 하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5. 회상

비행기가 곧 착륙 준비를 한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에 그가 잠에서 깼다.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니 조금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옆의 털보는 아직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털보나 자신이나 예전 같았으면 잔뜩 긴장해서 잠이 오지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자 웃음이 났다. 사무실에 너무 오래 있어서 현장 감각이 무뎌진 건 아닌지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오랜 세월 산전수전을 겪어온 그의 경험을 믿었다. 문득 회사에 입사했을 때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출장 갔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처럼 비즈니스 석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조총련계 간부가 오랜 기간 꾸준히 국내로 돈을 보내고 있는 정황을 포착하여, 이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일본에 있는 여러 계좌에서 한국의 한 계좌로 돈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조사 결과, 그 간부가 여러 차명 계좌를 이용해 돈을 송금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 회사에서는 국내에 잠입한 간첩을 지원하기 위해 자금이 일본을 우회해서 들어오는 것으로 판단했다. 회사는 한국에서의 돈의 흐름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는 일본으로 가서 그 간부가 어디에서 돈을 조달받는지 조사했다. 만약 북에서 받는 돈이라면 남파 간첩의 활동비 조달이 확실했다. 회사는 일본 경시청의 비밀 루트를 통해서 계좌 추적에 협조를 요청했다. 이때, 그는 흡사 일본인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일본어 실력을 이용해 경시청의 협조를 최대한 이끌어냈다. 결국 북에서 건너온 돈이 투자금의 명목으로 일본에 있는 회사로 가고, 다시 그 돈이 그에게 전달되는 것이 확인되었다. 회사에서는 첫 출장에서 일을 잘 마치고 돌아온 그를 칭찬했다.

옛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비행기가 쿵 소리를 내며 착륙했다. 그제야 털보가 눈을 떴다. 털보는 앞을 보며 하품을 했지만, 곧 심각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봤다.

“Once we get out of this airplane, we haven’t met each other. (우리가 이 비행기에서 내린 다음부터는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다.)”

그가 입가에 띤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When you find your luggage, there will be a phone.” (네 짐을 찾으면 그 안에 휴대전화가 하나 있을 것이다.)”

“Okay then, let me know when Lim starts moving.” (알았다. 임진철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알려줘.)

비행기가 게이트 앞에서 정차하자, 털보가 먼저 짐을 챙겨 나갔다. 그는 조금 기다렸다가 천천히 비행기 밖으로 나왔다. 그는 짐을 찾아보니 캐리어를 잠가놓은 자물쇠가 없어진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서쪽하늘에서 붉게 해가 지고 있었다.


6. 도시

독일 측에서 숙소로 정해준 시내 중심가의 호텔로 들어설 무렵 해는 완전히 저물어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카운터에 일본 여권을 내밀어 체크인을 했다. 그 사이 그는 호텔 로비를 둘러보았다. 카운터 옆쪽에 널찍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바와 그 옆으로 테이블들이 있었다. 전형적인 비즈니스호텔이었다. 바에 있는 테이블에서 아침도 먹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공간이 더 있는지 궁금해하던 찰나에 카운터에 서 있던 젊은 직원은 그에게 방 키를 건넸다.

“Your room is 316. Breakfast is from 7 to 9:30 am.” (당신의 방은 316호입니다. 아침식사는 7시부터 9시 30분 사이입니다.)

“Where is breakfast?” (아침식사는 어디서 하죠?)

“Oh, there is a dining room over there beside the elevator.” (저기 엘리베이터 옆에 식당이 있습니다.)

“Okay, Thank you.” 그가 말했다.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직원이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당장이라도 바에 내려가 시원한 독일 맥주를 한잔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언제 작전에 투입될지 몰라 참기로 했다.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캐리어에서 휴대전화를 찾아서 전원을 켰다. 아직 아무 메시지도 도착하지 않았다. 그는 짐을 풀고, 전화기를 세면대 위에 놓은 채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는 머리를 말리는 도중 허기를 느꼈다. 그는 지난 몇 시간 동안 물 한 잔 마신 것이 전부였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룸서비스로 버거와 콜라를 시켰다. 음식이 오는 동안 창가에 앉아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닦인 도로와 높이 솟은 건물들은 서울이나 세계의 다른 도시나 매한가지였다. 그는 지나치게 깨끗하거나 잘 정돈되어 있는 것들을 보면 그 뒤에 숨어 있는 누군가의 인위적인 노력이 느껴져 거부감부터 들었다. 누구보다 도시에 잘 적응한 사람 같지만, 사실 그는 기차가 드문드문 서는 작은 역을 가진 어느 시골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가 일하는 역 안 매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에 바닥은 쉽게 더러워졌고, 물건들은 흐트러지기 일쑤였다. 그는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바닥 청소와 물건 정리를 해야 했다. 그러다 종종 역 앞에 장터로 도망쳐 이것저것을 구경하기를 좋아했다. 혼자 집에 가는 길이 무서워서 벌벌 떨던 시골뜨기가 비밀요원이랍시고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이제 세상은 충분히 많이 봤으니, 은퇴하면 고향으로 내려가 기찻길에서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살고 싶었다. 혹여나 세상이 다시 그리울 때면 그 기찻길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룸서비스로 시킨 음식이 왔다. 그가 버거를 들고 크게 한 입 먹으려는 찰나 털보가 준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메시지였다.

-We found out the hotel where Lim is staying. Come to the following address right now. (우리는 임진철이 머물고 있는 호텔을 찾아냈어. 보내준 주소로 지금 당장 와.)

“젠장.”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버거를 다시 내려놓았다. 가져간 정장을 꺼내어 갈아입은 뒤 가방을 챙겨 방을 나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출구를 향해 급히 걸음을 옮겼다.


7. 도청

털보가 알려준 주소대로 찾아간 곳은 어느 교차로에 위치한 대형 서점이었다. 하지만 서점은 그날의 영업을 마치고 몇 개의 실내조명만 켜 둔 채 문이 닫혀 있었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어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어두운 색 정장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 한 명이 그의 앞에 섰다.

“Mr. Abe, this way please.” (미스터 아베, 이쪽으로 오세요.)

남자가 그를 건물 뒤편으로 안내했다. 서점의 직원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설치된 각종 장비들 앞에서 털보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곳이 베이스캠프였다. 털보가 그에게 다가가 이야기하던 당사자를 소개해줬다.

“This is agent Biedermann who is in charge of this operation.” (이쪽은 이번 작전을 책임지고 있는 비더만 요원이야.)

비더만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비더만은 그의 손을 잡고 흔드는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임진철을 찾기 위해 베를린 시내의 호텔을 전부 뒤졌다고 했다. 그의 표정만 봐도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어서 임진철은 서점 건너편 호텔에 투숙 중이며, 이틀째 방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독일 측 요원이 현재 임진철의 옆방을 잡아서 도청을 시도하고 있으나 벽을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가 깨끗하게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옛날 독일 건물들은 벽을 두껍게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간혹 북한말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임진철이 확실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임진철의 누구와 접선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필요가 있었다. 방법을 찾아서 단서를 알아낼 때까지 길고 긴 밤이 되리라 생각했다. 의외로, 방법은 쉽게 열렸다.

“The target just ordered room service.” (임진철이 방금 룸서비스를 주문했습니다.) 

베이스캠프의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이에 비더만은 그의 요원들에게 룸서비스 테이블 카트에 도청기를 숨길 방법을 찾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What did he order?” (무엇을 주문했지?) 

옆에 있는 털보가 물었다.

“He ordered a burger and a beer.” (버거와 맥주를 주문했다는군.)

비더만의 대답에 그는 아까 호텔에 남기고 온 버거와 콜라가 생각났다. 털보는 가방에서 작은 원통형 그릇을 꺼내더니, 여기에 케첩을 담아서 서빙하라고 비더만에게 말했다. 비더만은 그릇 밑바닥에는 작은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부하에게 건네주었다.

“I hope he doesn’t like ketchup so much.” (그가 케첩을 많이 좋아하지 않기를 빌어야지.)

털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룸서비스가 임진철에게 배달되었고, 도청기는 그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생생하게 베이스캠프로 전달했다.

“Mr. Abe. Now it’s your turn.” (미스터 아베, 이제 네 차례야.)

털보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임진철은 누군가와 통화 중인 듯했다. 그러나, 룸서비스가 왔다고 말하며 ‘내일 거기에서 보자’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털보와 비더만에게 들을 바를 말하자, 두 사람은 동시에 그를 향해 물었다.

“Where is there?” (거기가 어디야?)

“I don’t know.” (나도 몰라.)

“You never heard time either?” (시간도 못 들었어?)

“No. But he spoke in Korean. Probably, he will meet another North Korean.” (못 들었어. 하지만 임진철이 북한말로 얘기한 걸로 봐서 다른 북한 사람을 만나려는 거야.)

그들은 임진철이 버거를 다 먹을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렸다. 그는 심각하게 배가 고파왔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임진철이 버거와 함께 나간 감자튀김을 먹을 때, 케첩을 많이 찍어먹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임진철은 식사를 마치고 얼마 뒤, 방안의 불을 껐다. 아마도 잠자리에 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밤 10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베이스캠프의 요원들은 그가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보아 내일 아침 일찍 움직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Lim is moving.” (임진철이 움직이다.)

임진철이 이틀 만에 방문 밖으로 나선 시각은 밤 10시 30분이었다.


8. 기억의 조각

임진철이 택시에서 내려서 들어간 곳은 베를린 시내에 있는 다른 호텔이었다. 털보와 그가 도청장치를 몸에 숨긴 채 호텔 안으로 들어갔을 때, 임진철은 호텔 바 뒤편에 있는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를 제외하고는 바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고 있는 남녀 커플만 눈에 띄었다. 털보와 그는 바의 중간쯤에 위치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키가 짤막한 동양계 여자가 임진철에게 맥주를 서빙하고 돌아오며 그들에게 웃으며 독일어로 인사했다. 그들은 온 신경이 임진철에게 가있어 그녀의 인사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바 테이블 위에 있던 메뉴 두 개를 들고 그들에게 다가와서 이번에는 영어로 말했다.

“The chef got off just now. So, no dishes tonight. Anything to drink?” (주방장이 방금 전 퇴근했어요. 그래서 요리는 안 되겠네요. 뭐 마실 것 드릴까요?)

“I want a beer. you? then, two beers.” 

털보는 그에게 맥주를 마실 것인지 묻고는 맥주 두 잔을 주문했다.

“I’m kind of hungry. Do you have something to munch on?” (나는 약간 배가 고픈데. 뭐 씹을 거라도 있어요?)

그가 털보의 주문이 끝나자 재빨리 말을 붙여 먹을거리를 찾았다.

“I can get you some biscuits.” (비스킷을 갖다 줄 수 있어요.)

“That’ll be good.” (그거면 됐어요.)

잠시 뒤 그녀는 두 잔의 맥주를 한 손에, 다른 손에는 비스킷이 담긴 접시를 들고 그들에게 왔다. 그들의 테이블에 맥주잔을 먼저 내려놓고, 비스킷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으려는 찰나 손이 무엇에 걸렸는지 비스킷을 바닥에 쏟고 말았다. 당황한 그녀는 허둥지둥 쏟아진 비스킷을 접시에 다시 담았다.

“I’m so sorry. I’ll get you another one.”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갖다 드릴게요.) 

“That’s all right. My mom told me that it’s no shame to eat fallen food. You should always think about the poor.” (괜찮아요. 나의 어머니는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 것은 부끄럽지 않다고 말했죠. 그것도 못 먹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털보는 무안해하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그녀가 들고 있는 비스킷 접시를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사이 그는 임진철을 흘끔 바라봤다가, 그녀가 테이블을 떠난 뒤 털보에게 말했다.

“My mother told me exactly the opposite. You should keep your dignity.” (나의 어머니는 정확히 반대로 말씀하셨어. 너의 존엄은 스스로 지키라고.)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그가 매점 바닥 청소를 하거나 물건을 정리하면 상으로 과자 한 봉지를 주곤 했다. 어느 날, 그가 실수로 바닥에 흘린 과자를 주워 먹으려 했을 때, 그것을 본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날 무엇 때문에 과자를 얻어먹게 되었는지, 무엇에 정신이 팔려서 과자를 흘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앞뒤가 다 잘려 한 편의 조각과도 같은 30년 전 그 순간이 기억이 났다. 그때 어머니는 ‘개돼지나 바닥에 흘린 음식 먹는다.’고 말씀하셨다.

털보와 맥주잔을 기울이며 임진철을 감시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눈이 풀리더니 털보가 의자 밑으로 쓰러졌다. 그는 당황하며 털보와 임진철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봤다. 그 순간 임진철은 바의 뒤편으로 난 문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그는 임진철과 털보 중에 털보를 선택했다. 쓰러진 털보를 끌어 앉고 서둘러 도청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Agent down. I repeat agent down.” (요원이 당했다. 다시 반복한다. 요원이 당했다.)

독일 측 요원들이 털보가 쓰러진 호텔 바로 들이닥쳤을 때는 임진철과 함께 비스킷을 서빙한 동양계 여자도 사라진 뒤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베이스캠프에 있던 독일 측 요원들이 임진철이 머물던 호텔방을 열고 들어갔다. 그들은 거기서 바닥이 드러난 케첩 그릇을 발견했다.


9. 에필로그

“귀국했으면 바로 출근해서 보고를 해야지. 자네는 어디를 다녀온 건가? 이번 일로 위에서 어느 정도 문책이 있을 거야.”

고향에서 곧장 회사로 출근한 그에게 국장이 말했다.

“비록 자네가 주도한 작전은 아니라고 해도, 국제 공조 중에 상대측 요원이 죽었어. 작전도 실패해서 임진철 이 새끼는 어디로 숨어버렸는지도 모르고.”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번 일로 자네 파일을 좀 들여다봤는데, 자네 외조부가 일본인이었어?”

“이제 와서 그게 문제가 됩니까?”

“파일에는 그냥 사업가였다고만 나와 있어서 조사를 좀 해봤더니, 그냥 사업가가 아니었더군. 조선인들 강제로 부려서 그릇 공장을 돌렸던데. 돈 꽤나 벌었겠어.”

“해방 때 가족들 다 남겨두고 돈만 챙겨서 일본으로 도망갔다고 들었습니다.”

“누구한테? 그건 어머니께 들었나?”

“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한평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자네 일본어는 어머니께 배웠겠지.”

“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알았어. 이 사실이 위에 알려져 봤자, 이번 문책에 도움이 될 것이 하나도 없을 거야. 이건 그냥 내 선에서 덮어두지.”

“알겠습니다.”

“나가봐.”

그가 국장의 방문을 열고 나왔다. 긴 복도를 따라 나열되어 있는 사무실 문을 보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복도를 천천히 걷다가 그 문들 중에 하나를 열고 들어갔다.


-끝-



이 이야기는 추석 연휴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썼습니다.

고향집에 다녀와서 어머니 생각이 나기도 했고, 추석 연휴 동안 첩보 소설을 읽었는데 이 둘이 혼합되어서 탄생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한순간의 선택이 목숨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하다면, 그 선택을 한 당사자는 운이 좋은 걸까요? 본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요? 

금방 대답하기 힘든 질문입니다.

저는왜 이런 소설을 쓰고 있을까요? 우연일까요? 그런 사람이라서 그럴까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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