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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좋아 Nov 02. 2024

바람개비 2

한 남자가 집착하는 관념과 행동, 그리고 우연히 만난 한 소녀의 이야기

“이 방을 쓰렴. 전에 딸애가 쓰던 방인데, 한동안 침대를 안 쓰긴 했지만 괜찮을 거야. 화장실은 저쪽에 있고.”

거실로 들어온 소녀에게 집안 이쪽저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안내했다. 주방의 불을 켜고 식탁 위에 사 온 와인을 놓았다. 그 사이 소녀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안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으며 ‘그 사건’ 이후로 ‘딸’이란 말을 다시 입 밖으로 꺼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옷을 다 갈아입은 나는 딸의 방에 있는 옷장에서 소녀가 갈아입을 만한 편한 옷을 찾았다. 소녀의 체격이 작아서 아내의 옷보다 딸의 옷이 더 맞을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소녀에게 옷을 건네주고는 나는 욕실로 들어가서 세수를 하고 손발을 씻었다. 그 사이 소녀는 교복을 벗고 딸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조금 작은 감이 있었지만, 하룻밤 보내기에는 불편해 보이진 않았다. 나는 소녀에게 욕실로 가서 씻으라고 한 뒤, 식탁으로 가서 사 온 와인을 정리했다. 그중 한 병을 따서 와인 잔을 채웠다. 피노누아의 과일향이 공기 중에 스며들었다. 식탁에 앉아 혼자 홀짝거리고 있을 때, 얼굴에 물을 잔뜩 묻힌 소녀가 욕실 밖으로 나왔다.

“욕실에 수건 남은 게 없어?”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빨리 안방 옷장 속에서 수건 한 개를 꺼내 들고 거실로 나왔다. 수건을 받아 든 소녀는 얼굴을 닦고 딸의 방으로 들어갔다. 와인 한 잔을 다 마시고, 두 번째 잔을 채우고 있을 때 소녀가 방에서 나왔다.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말 수가 적은 소녀가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제 딴에는 방에서 많이 고민했으리라 생각했다.

“딸 같아서 그래.”

“아저씨 딸은 여기서 같이 안 사나요?”

“응, 이제 같이 안 살아.”

나의 대답에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술 마시는 거 좋아하세요? 우리 아빠도 술 엄청 많이 마시는데.”

“응, 이건 뭐랄까? 약 대신 먹는 거야. 아저씨가 조금 아픈 데가 있거든.”

“그래도 술이 약이라니... 우리 아빠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약을 먹는데...”

“응, 살다 보면 술이 약이 될 때도 있어. 그런데, 아버지랑 할머니랑 너랑 이렇게 셋이 같이 사는 거니?”

“아니요, 아빠는 일 나갔다가 어쩌다 가끔 들어오고, 할머니랑 저만 같이 살아요. 오늘같이 아빠가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날이 가끔 있어요. 할머니가 말려도 소용없어요. 할머니가 엄마도 그래서 나갔대요. 전 그냥 아빠가 싫어요.”

딸의 티셔츠 라운드 넥 위로 보이는 소녀의 가냘픈 목에 힘이 들어갔다.

“아빠가 또 술 먹고 행패 부리면 어떻게 하려고?”

나는 짐짓 걱정이 되는 투로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래.”

“아, 돈 모으려고요. 돈 모아서 어디 찜질방이나 이런 데로 도망치려고요. 그래서 알바 같은 거라도 구하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녀봤는데, 아직 어리다고 아무도 안 시켜줘요.”

“그래, 알았다. 추운데 돌아다니느라고 피곤했을 텐데, 방에 들어가서 쉬다가 자라.”

“네.”

소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딸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시던 와인을 천천히 다 비우고,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머리맡 탁자에 놓인 소설을 집어 들었으나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벽녘 밝은 기운에 눈이 잠시 떠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읽던 소설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소설을 집어 다시 탁자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의 불을 끄고 다시 누웠다. 금방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집안이 평소처럼 조용했다. 딸의 방문에 노크하려다가 현관을 보니 소녀의 신발이 없는 것을 알았다. 역시나 노크를 해도 응답이 없었다. 방문을 여니 침대 위에 가지런히 개어진 딸의 옷만 보였다.

‘아침이라도 먹고 가지.’

하고 생각했으나, 집에 먹을 게 마땅치 않다는 게 떠올랐다. 또 어딘가에서 행인에게 돈을 빌리는 소녀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꺼내어 몇 모금 들이키고는 다시 넣었다. 욕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닦았다. 로션이 떨어졌다. 마지막 몇 방울을 얼굴에 발랐다. 다시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를 꺼내 그릇에 담은 시리얼에 부었다. 아침은 늘 이렇게 간편식으로 때운다. 간혹 계란 프라이를 할 때도 있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떨어졌다. 시리얼을 먹으며 딸의 옷을 입었던 소녀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의 옷이 맞으니 소녀가 작긴 하구나.’

다음에 또 만나면 딸의 옷 몇 벌을 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때에는 소녀가 자라 있겠지, 하고 단념했다. 그래도 만약을 위해 딸의 옷은 빨아서 다시 잘 개어놔야겠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연달았다.

‘이름도 못 물어봤구나.’

오늘은 먹을 것을 좀 사러 마트에 가고, 빨래도 하고, 백화점 근처에 다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 만에 다시 찾은 백화점 주변 길가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캐럴 소리가 울려 퍼지는 토요일의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 혹시 소녀를 다시 마주칠까, 하는 마음에 나는 초조하기만 했다. 한 시간 가량 주변을 서성였지만 소녀를 볼 수는 없었다. 추운 데 오래 있었더니, 코트 안으로 한기가 스멀스멀 파고들었다. 길가에 화장품 가게가 보여서 떨어진 로션을 사려고 들어갔다. 진열된 화장품들을 보면서도 소녀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은 집으로 들어간 걸까?’

‘소녀의 아버지가 다시 폭력을 휘두르면 어쩌지?’

모두 다 소녀의 거짓말일 수도 있었지만, 걱정되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아침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어야 하는데.’

하고 뒤늦게 후회를 했다. 나는 점원이 추천해준 남성용 로션 한 개를 사들고 나왔다.

백화점 근처까지 온 김에 다시 백화점에 들러 와인을 몇 명 사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별생각 없이 할인 행사 중인 프랑스 와인 두 개가 든 상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계산대에서 손이 하얀 그 여자 점원이 계산을 했다. 

“혹시 백화점 카드 있으세요?”

그녀는 상자를 닫고 백에 넣으며 어제와 같이 물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가로로 젓는다.

“할인이 되어서 5만 9천 원이에요.”

카드를 내미는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와인 백을 들고 백화점을 나서 맞은편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어둑어둑해진 뒤에야 집에 들어왔다. 거실과 주방의 불을 켜고 사온 와인 정리했다. 평소처럼 방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욕실로 가서 손과 발을 씻었다. 그 후 식탁에 앉아 어제 마시다 만 와인을 잔에 부어 천천히 마셨다. 주방 옆 다용도실에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외출하기 전에 돌려놓은 빨래가 건조되고 있었다. 와인 첫 잔을 다 마시고 두 번째 잔을 채우고 있을 때, 세탁이 종료되는 알람 소리가 들렸다. 세탁기에서 다 마른 딸의 옷을 꺼냈다. 식탁 위에서 가지런히 개어 딸의 방으로 가져갔다. 옷장에 넣고 나오려는 찰나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딸의 책상을 쳐다봤다. 그게 없어졌다.

바람개비.

딸이 어릴 적 미술학원에 다닐 때, 내 생일 선물이라면서 만들어주었던 바람개비였다. 노란색 색종이로 만든 바람개비가 초록색 수수깡에 고정되어 있었다. 옷장의 상자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그 사건’ 이후로 딸의 책상 위에 놓았다. 절대 시들지 않을 국화꽃 마냥.

소녀가 가져간 게 틀림없다. 왜 굳이 값나가는 물건도 아닌, 하필이면 바람개비를 가져갔을까? 딸의 방을 나오면서 나는 극심한 상실감을 느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억누르려고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토가 나올 것처럼 헛구역질이 나와 화장실로 갔으나, 아무것도 쏟아내지 못했다. 나는 변기를 잡고 그대로 욕실 바닥에 앉았다.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그대로 흐느끼며 울었다. 그대로 몇 분이 흘러 약간 진정이 되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와서 코트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찾아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연결음이 오랫동안 들리더니 이윽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어머님...”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어머님... 박서방입니다.”

눈물과 함께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말들이 새어 나왔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선아가... 선아가...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휴대폰을 붙잡고 오열하며 간신히 말을 붙여나갔다.

“선아가... 저 때문에... 정말... 죄송합니다... 그동안...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귓속에 ‘괜찮다. 괜찮다.’ 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전화기에 대고 흐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그동안 그 소리가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괜찮다. 괜찮다.’


전화를 끊고 세면대로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흐르는 물에 눈물을 다 씻어 냈으나, 거울로 보이는 붉게 물든 두 눈은 지워낼 수 없었다. 마른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으면서,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되었다. 욕실 밖으로 나와 한참 동안 멍하니 식탁에 앉아 있었다. 전에 벽지에 쓴 유서를 가리기 위해 흰 종이를 덧댄 자국이 보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슬슬 배가 고파왔다. 눈앞에 가득 차있는 와인 잔을 들고 싱크대로 가서 와인을 쏟아 버렸다. 그리고 다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뒤, 어제 갔던 설렁탕집으로 향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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