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번 울고, 두번 화나고, 한번 어이없고, 한번 환희로운 날.
작년 오늘은 지리산에 들렸다.
남해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영 적적해서 하동에서부터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지리산 표지판을 따라 막 드라이브를 했다. 비가 촉촉히 오는 날이었다. 낙엽이 적당히 남아있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서 자꾸 창문에 단풍진 낙엽들이 걸리던 날. 멀리서 초록색의 물빛과 비가 와 일어난 흙탕물빛. 여러개의 물색을 가르던 원앙가족들. 어딜 지나도 차가 없고 문 연 가게도 별로 없어서 결국 지리산 자락에서 햄버거를 먹었던 이상한 날. 돌아온 이후로 내내 그 풍경들을 그리워했다. 가을는 꼭, 지리산에 가야하는거구나! 그리고 곧 지리산에 간다 아오 신나!!!! 여행을 기대하는 힘으로 일을 했다. 내일까지도 유효할 것 같다.
점심먹곤 화물도 찾아오고 납품도 했다. 몇 년 전에는 정말 디자인하는만큼 납품을 하러 다녔는데 바쁜 와중에 흐름이 끊겨서 정말 왕 짜증이 나면서도, 무거운 박스를 번쩍번쩍 들어내는 기분이 씩씩해서 좋았었다. 오랜만에 그런 일을 해서 기분이 좋았다. 커피대신 '건강음료'를 마셨다.
제이지와 또 종알종알 회의를 하고. 올해 나에게 좋은 기운을 준 정말 고마운 사람! 연말에 장문의 편지를 써야지. 내가 뭘 얼마나 배우고 좋은 도약을 했는지, 덕분에. 여하튼 일 얘기를 이리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복 받은 일이다. 덕분에 굉장히 많은 연결고리들도 생기고, 그 고리들이 녹슬지 않게 부드럽게 닦아내는 일 역시도 나의 숙제다.
한번 어이없고.
제이지와 호다닥 회의를 하고 급한 마감들을 처리하고 머리를 하러 갔다. 올해 나의 패턴을 보니 아주 정확히 두 달에 한번씩 미용실에 갔다. 3월, 5월, 7월, 9월. 평범하게 다듬기.. 정도만 했으면 좋으려만 내가 미용실에 갈 때는 대체로 그 머리를 관리하기 어렵거나 지겨움을 견딜 수 없을 때다. 지금은 전자의 이유로 갔으나, 후자에서 해결할 법한 일을 저질렀다. 왜 항상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게 될까. 앞머리가 짧은 덕에 더더욱... 삽살개같이 되어버렸고 이제까지 했던 머리 중에 최고 웃기다. 나 어떻게 해! 그치만 너무 웃겨서 현실감각이 약간 사라져버렸다. 시내와 가혜에게 내일 날 놀리지 않기로 약속을 받았다.
갑자기 생각 난 머리 자른 에피소드 중에 가장 어이없던 것. 예전에 신부동에서 서명부스 지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교대하러 온 가혜가 나름 열심히 길렀던 나의 긴 머리를 보고는 '너 머리 너무 진부하다..'라고 했다. 그 말을 뭔가 참을 수가 없어서 그 날 당장 숏컷으로 잘랐던 기억. 시발 진부함이라니 용서하지 못해. 이런 심정이었을까. 아무튼 오늘 머리 사진을 보고는 가혜가 '너무 혁신했네...너 혁신살롱 인터뷰해도 되냐'라고 했다.
나란 인간 왜 이렇게 중간을 찾기 어려운걸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생겼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번 환희롭고.
아무튼 미용실에서 로뜨를 말고 있는동안 개기월식이 시작한다는 걸 알고 굉장히 초조했다. 온니... 제 머리는 어떻게 되도 좋으니 달을 보러 갈 수 있게해주세요.... 머리보다 달 생각이 커져서, 제대로 말리지 않고 금석천으로 급하게 넘어갔다. 붉은 달에 거뭇한 그림자가 끼어있었다. 처음보는 낯선 광경! 한참을 보다가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옥상을 계속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봤다. 일을 하려고 방에 들어와 실시간 영상을 틀었는데 달의 왼쪽으로 빛이 반짝 빼꼼히 비추기 시작. 저게 뭐지하고 있었는데 지금 달을 보아야한다는 말을 듣고 옥상으로 뛰어올라가서 달이 조금씩 빛을 찾아내는 장면을 보았다. 정말 신기하고 이상한 순간. 달이 찬찬히 채워지는 것도, 지구 그림자가 달을 가리고 있는 것들도 보였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이 하늘을 다들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각자의 소원들을 빌어내겠지. 그런 장면을 생각하면 어쩐지 영화같이 아름답고 짠해진다.
두번 화나고.
1.
그렇지만 동시에. 이렇게 영화같은 장면을 함께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자꾸 생각났다.
천안에서 이태원 참사 분향소를 차렸는데 그걸 그새 누가 훼손을 했다고 한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현수막을 싹 거두어가고 무엇보다 화난 것은 횡단보도 앞에 계신 구걸하시는 분에게 국화를 나누어 준 것. 그 분 앞에 국화들이 떡하니 놓여있는 장면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너무 화가 났다.
살아있는 사람, 그럼에도 살아있어야하는 사람, 불행히도 살아있지 못하는 사람.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 선 어디쯤에 있다. 그래서 서로의 삶과 슬픔을 공명하지 않나. 그걸 인간이라 부르지 않나.
겨우 살아있는 사람이, 살아있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할 수 있는 애도를 해치고. 살아있어야하는 사람의 자리에 살지 못한 자의 슬픔을 조롱처럼 놓아둔 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건가. 그 자리는 사람의 자리인가. 왜 조금도 사람답게 살려하지 않을까.
내일은 분향소에 꼭 가볼 것이다. 이 삽살개 머리를 하고 애도하고 싸워내야지.
2.
인스타에서 마포작은도서관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글을 봤다. 마포뿐만 아니라 전국의 작은도서관을 운영하기 위한 예산, 시민들의 작은 시도를 지원하는 커뮤니티 지원사업들의 예산이 대폭 삭감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이 정권이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선명하게 알 것 같다. 계속 말하고 읽고 쓰는 일들을 부지런히 해야겠다. 그동안 했던 일이 헛된수고가 아니라는 걸 덕분에 알게 되었다.
한번 울고.
전진희의 새 앨범이 나와서 출근길에 들었다. 겨울연가라는 제목을 가진 노래. 겨울 창문을 보며 듣기 좋은 음악이다. 앨범커버는 곽명주의 그림. 커다란 창 밖으로 반려견과 함께 눈을 바라보고 있는 따스한 장면을 담았다. 노래를 들으며 앨범커버를 보는데 갑자기 작년 생일에 펑펑 눈이 내리는 창문을 조르바와 함께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또 눈처럼 펑펑 샘이 솟아나고. 이 슬픔이 일종의 습관 같아서 사실 지난주 호두와글엔 이 글을 쓰고 고민하다 쟁여두었다. 눈처럼 펑펑. 겨울을 잘 보내야할텐데.
덧. 잊지 않겠다.
일기쓰면서도 열받는 댓글을 보았다. 현수막 훼손을 했다는 글에 지역에서 오래 자리차지 하고 있는 어느 양반이, "일단 다양성을 인정하시고. 개인적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음을 알려줘야 '다시 민주주의'가 가능"하단 개소리. 우리가 하자는 게 고작 민주주의인가? 사람답게 살자고 말하는건데 말 귀를 못 쳐 알아듣고. 거기에 정치. 아니 시발 정치도 아니야 정파의 자리가 껴들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