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여행_11.10-13

by 소산공원

만추여행. 꽉 찬 가을을 지리산에서 보냈다. 너무 좋은 순간이 많아서 심지어 슬프기까지 했다. 몽골에서 멀리 신기루가 보이는 들판을 지날 때 몽몽이 '얼마나 그리워질까'라는 말을 했을 때 눈물이 찔끔 차올랐던 순간처럼. 오래 그리울 풍경들을 안았다.


<1일차>

아침에 출발에 구례에 도착하자마자 다슬기수제비와 막걸리를 마셨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온 몸으로 쌍산재를 산책했다. 누워있어야함이 마땅한데, '힘들겠지만 눕지말아주세요'하는 표지판이 있어 눕지도 앉지도 못한채 친구들을 기다렸다. 몰래 몰래 누울 수 있는 공간들과 가을 빛깔을 찾아다녔다. 친화력이 좋은 고양이가 도마뱀을 댕강댕강 마디내는 것을 보았다. 석류 나무에서 떨어져 깨진 석류알을 몇 알 꺼내먹었다. 시간이 알맞아서 한차례 방문자의 소란을 지나 조용한 고택을 산책했다.


구례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사성암 때문이었다. 바위가 끌리던 시기에 인스타에서 사성암의 사진을 보았는데 커다란 절벽에 세워진 절을 보며 꼭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컴컴한 질감의 바위를 보고 싶었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을 했다. 술을 챙겨오거나, 취하지 못한 상태로 온 것이 아쉬웠다. 손톱을 긁어 새겼다는 그림을 봤다. 뭔가 만난 불상 중에 가장 사람답게 생겼달까. 아래가 뻥 뚫린 마루 위에서 한참을 멀리 뚫린 하늘을 보다가, 동굴을 지나다가, 멀리 구례시가지를 보다가, 마침맞은 커다랗고 빨간 해가 넘어가는 길을 봤다.


숙소에 노래방 기계가 있어 그 날밤에는 시끄럽게 노래를 불렀다. 절대음감이지만 음치인 친구랑, 걍 음치이지만 신나는 친구랑, 깜빡이 없이 치고 들어오는 친구랑, 생전 처음 겪는 노래방의 캐미를 보았다. 시끄럽고 이상한 밤이었다.


<2일차>

불 앞에서 잠들고 아침엔 조금 몽롱한 채로 몇 차례 깼다. 그리고 오전엔 아주 이상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괴로운 상상들을 했다. 그런 불안은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잊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괴로웠던 시간들이 통째로 다가왔다. 매일 댓병의 술을 먹던 아버지가 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던 밤, 만취하면 폭력적인 주정을 해대서 몸과 생을 망치고 말았던 구남편의 밤. 걱정을 안은 채로 선잠이들었을 때 꾸던 꿈들, 불안으로 타버리면서 차라리 빨리 뭐든 마주했으면 하던 초조한 기억들이. 비겁했다. 친구들 덕에 다행히 할 수 있었던 가장 낯설고 현실적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행운을 안고 온 사람과 함께 소란을 마쳤다.


그날 밤엔 이제 모든 근사하단 말 앞에 서있을 수 있는 가장 근사한 공간에 갔다. 볕이 막 저물 때쯤 '샘이 숨어있는 절'이라는 뜻에 천은사에 들렀다. 바다같이 반짝 거리는 못이 숨어있는 절이었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와 무지무지 너무 좋다.. 하며 화엄사로 넘어갔는데 입구의 조명부터 마음이 설렜다. 법고라는 말은 가혜를 통해 처음 들었고, 커다란 북과 북치는 스님을 보고 싶어 찾은 곳이었다. 역시나 타이밍을 잘 맞춘 덕에 사람이 거의 없는 시간에 도착했다. 뭐든지 큰 절이었는데 그 균형들이 너무 잘 맞아서 놀라웠다. 어떤 웅장하고 거대한 것들을 보면 기가 눌리면서 약간의 불쾌한 감각같은 것들을 느낄 때가 있는데, 오히려 지리산 자락의 넉넉한 풍경과 어우러지면서 절로 존경심을 품게 했달까. 작아지면서 차분해지는 느낌.


법고를 보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그렇게 커다란 종소리를 들은 것도 처음있는 일이었다. 종소리가 울리는 순간 정말 이상하게도 모든 잡다한 감정들이 흩어져버렸다. 일이고 걱정이고 뭐고. 그냥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복잡한 것들을 생각하는게 하나도 의미가 없어진 듯했다. 타종이 끝나고 왼쪽 멀리서 다시 얇은 종소리와 목탁 소리가 들리고 스님들이 염불을 외는 소리.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내일 조금 이른 시간에 한번 더 오자는 약속을 했다.


저녁엔 숙소 근처에 있는 형제봉 주막에 갔다. 동네에 있으면 일주일에 이틀 이상은 가고 싶어질 것 같은 공간. 그게 지리산 안에 있다니. 1인 1안주씩을 먹고, 달빛정감막걸리를 몇 통이고 먹고 처음 경험하는 좋은 사케를 먹고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 화엄사에 갔다 오는 길에 한번 더 오자고 떼를 썼다. 그날 밤도 역시 노래를 불렀는데 기계에 노래가 없어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친구와, 역시나 걍 음치인 신나는 친구랑, 절대음감이지만 음치이고 음색이 좋은 친구와 노래를 불렀다. 나도 매일 부르던 노래들을 불렀다.


<3일차>

또 불 앞에서 따끈하게 잠을 잤다. 아침이 되니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일찍 눈이 떠졌다. 오늘도 갑자기 무언가가가 사라져있었다. 어제랑 똑같이 사장님을 깨워 묻고 수런수런 하다가.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차를 가지러 형제봉주막으로 다시 걸어갔다. 왼쪽 하늘에는 안개가 자욱한 산자락 위로 해가 떠오르고 오른쪽 하늘엔 구름다리 위쪽으로 달이 떠있었다. 참새나무를 지나 '어제 이렇게나 먼 길을 취한 채로 걸어오다니..'반성하며 아침 산책을 했다. 덕분에 몸이 개운해졌다. 아침을 해 먹고 숙소 근처에 있는 축지리 문암송을 보러갔다. 감 일을 하는 마을과 단풍이 알맞은 길을 굽이 굽이 올라가서 차를 세워놓고는 소나무 밑에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지리산 밑에 있는 건 뭐 이렇게 다 크고 이러냐. 바위도 크고 나무도 말도 안되게 크고. 시내가 소나무 신령님 같았다. 염원을 빌고 기댈 수 있는 존재 아래선 어떻게 살아가려나. 그게 이렇게 큰 바위틈에서 자란 나무라면.


지금까지는 막걸리+노래방만 말했지만 사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다정한 문학기행이었다. 광양에 있는 '정병욱가옥'에 갔다. 윤동주의 시를 마루 밑에 보관했다 나중에 유작을 모아 시집을 내어, 사실상 윤동주의 시를 완성한 사람. 그렇지만 무례한 해설사 때문에 맘이 상해서 불쾌한 채로 자리를 떠났다. 다들 말을 아꼈지만 같은 감정을 느끼고 비슷한 대응을 한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얼른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달까. 점심을 맛나게 먹고 다시 화엄사로. 어제보다 일찍 온 덕분에 각황사 뒤에 있는 사자탑에 오를 수 있었다. 비가 온다는 예고가 한참 전에 있었지만 먹구름이 조마조마 스치기만 했다. 사자탑에 오르니 각황사의 지붕과 서래가 한 눈에 들어왔고 커다란 지리산에 둘러쌓인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지리산 아래에선 화엄사도 작구나. 해그림자들이 멋져 다같이 산자락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 위로 무지개가 뿅 하고 떠올랐다. 소리를 지르다가 말문이 막혔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러던 와중에 딱 적당한 비가 툭툭히 내렸다. 역시나 같이 있지 못한 친구들이 너무 아쉬웠다. 무지개야 뭐 어쩌다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좋은 화엄사에 와서, 좋아하는 친구들과, 좋아하는 비를 기다리며, 좋아하는 산과 그림자를 보면서 무지개가 떠오르는 순간을. 어찌 툭툭 지나칠 수 있을까.


표지판에 나와 궁금했던 모과나무 기둥이 있는 구층암을 올라가는 길 자체가 환상적이었다. 웅장한 고요에서 벗어나 소박한 정원을 지나 방금 전 비로 젖어버린 대나무 숲길을 걷는 일이란. 미니단풍 잎새와 대나무 사이로 내리는 해와 바람의 해장. 구층앞 근처에는 에에올을 연상할만한 법당이 있었고 짧은 기도를 드리고 법당 뒷쪽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커다란 적막에 삼켜지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의 들뜨고 설레는 마음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섬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고독하고 편편한 마음으로 길을 내려오는데 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끔 가만히 눈을 감고 있거나 명상을 할 때 바위같은 검은 존재 외에 모든 것이 사라진듯한 느낌을 받곤 했는데 마치 그런 느낌이었다. 기도하라고 준비된 시간 같아 커다란 불상들 앞에서 평안을 기도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평안. 그러니 당신의 몫일 평안. 그것들을 동시에 기도하게 해달라고. 바라게 해달라고. 우리가 이 여행을 평안하게 마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법고 시간이 돌아오고 어제와 다른 마음으로 종소리를 들었다. 각황사 뒷쪽으로 들리던 목탁소리를 가까이 듣고 싶어서 사자탑에 부랴부랴 올라갔다. 무지개를 봤던 자리에서 울림을 겪으며 눈을 감고 조용히. 잠깐 있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조금 무서웠지만 가만히 명상을 하다 인기척이 들려 뒤를 돌아보니 사장님이 있었고 서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좋은 자리에서 자주 마주치는 친구들이란.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가장 좋은 시간들을 보냈을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좋아졌다. 의식이 끝나고 염불 외는 건물들을 한바퀴씩 돌아 걷고 있으니 내 발자국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렸다. 스님들이 절에서 뛰지말아라-했던 이유를 알 게 되었다.

화엄사에서 나와 또 어제 갔던 주막에 들렀다. 가는 길에 비가 왕창 쏟아지고 슬픈 인연을 부르면서 갔다. 비가 와서 또 다르게 좋은 밤이었다. 다같이 가게 벽에 붙어 처마에 떨어지는 비를 보며 막걸리를 마셨다. 사장님이 스윽 들어가더니 비 노래들을 틀어주셨다. 숙소에 가선 친구들을 마구 주무르며 몸을 읽었다. 또 새벽까지 수다를 하고 불 앞에서 잤다.


<4일차>

잠이 충분하진 못했지만 역시나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진다. 어쩌다보니 일요일까지 오게 된거지. 아침부터 괜한 내일을 걱정하며 아이고-아이고를 했다. 밥상을 치우고 짐을 싸서 모아두곤 최참판댁에 갔다. 비교할 것은 정말 아니지만... 고즈넉의 최대치를 경험한 탓인지 소란스럽고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몇가지 낙엽들이 데굴데굴한다거나 물길이 퐁퐁 그려지는 벽이 좋았다. 박완서 기념관이 좋았다. 나의 상상과 이야기 안에서만 사는 존재를 매일 생각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그리웠을까. 만지고 싶었을까. 그렇게 오랫동안 같은 이야기 안에 사는 건 뭘까. 그들과 이별하고 사랑하는 건 어떤 기분이었을까. 박경리는 문학이 곧 자기자신이라고 했는데 오래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람의 당연한 삶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도리어 얼마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유품과 생활의 흔적들이 반갑게 느껴졌다. 토지를 읽고 갔으면 더 좋았으련만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마지막날이라 조금씩은 시무룩한 채로. 숙소의 주인이 대접해주신 숙소 근처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길지 않은 여행이었는데 같은 점심을 두번 먹고, 갔던 절을 두번가고, 같은 술집을 두번가고. 이게 되는 친구들이라 너무 좋았다. 두번 간 덕에 처음에 발견하지 못했던 메뉴를 또 먹게 되었고 그것이 너무나도 내 서타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에 또 와야할 이유들이 수두룩했다. 얄팍하지 않은 여행이었다. 밥을 먹으며 마지막으로 하동의 차를 마시고 싶어서 이런 저런 검색을 하며 제안하다가 동네 근처에 다원을 발견해서 갔다. 가보니 뭔가 외부인들에게 오픈하는 다원은 아니었고 숙박을 중심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역시나 대충 알아본 탓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군.. 하고 미안하고 머슥해하며, 차를 우려주시는 선생님을 마주했는데 여기서 여행의 완벽한 정점을 찍어버렸다.


몽몽과 여행친구들의 공통감각인 일본의 미노루 선생님 이야기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몇번이고 빠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차를 내려주시는 선생님이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물었고, 자연스럽게 또 일본과 미노루 선생님 이야기가 나왔다. 그 분도 일본을 여러차례 여행했고 엔카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한참 하시다가.. 사실 일본에 3년정도 사셨다고 늦게 말을 하신다. 어디서 사셨냐고 묻자 '미조노구치'라고 얘기하셨는데 갑자기 몽몽과 호철과 사장님이 '미조노구치???!!!!'하며 머리를 쥐어싸고 소리를 질렀다. 맥락을 모르는 나와 가혜는 벙벙해져서 모야모야 왜 구래 했는데 그 미노루 선생님의 가게가 있는 곳, 모두의 공통감각이 있는 공간이 미조노구치였던거다. 우연히 들린, 지리산 다원에서 공통감각을 가진 사람이 떡하니 만나버린거다. 그때부터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운명과 인연을 끄덕끄덕 받아들이며 직접 부른 엔카를 듣고 차를 더 마시고 반드시 있을 다음을 기약했다. 말도 안되는 여행의 마무리였달까. 정말 이들과의 여행엔 요정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엔 몇 번 큰 사고가 날뻔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모두가 집에 들어갔다.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상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불가능한 상상들이 동시에 일어난 이상한 여행. 모두의 충분한 기도들이 모여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독 여운이 요상하게 길다. 조만간 또 화엄사에 가게 될 것 같다.


이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배운다. '네 하고 합니다'와 비슷한 것인데, 네가 좋아하고 말하는 그것을 그냥 그대로 해보는 것이다. 이쪽으로 와서 봐봐 하면 그쪽으로 가서 좋아하고, 이 풍경이 좋아, 라고 말하면 나도 그 풍경을 좋아한다. 이거 정말 맛있어, 하면 맛있어한다. 비록 불편한 것도, 몸을 참아내야하는 것도 같이 할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은 일일거다. 더 연습해야지. 다른 사람들이 겪은 것들을 그대로 겪어보는 것. 의심하지 않는 것, 젖어드는 것. 적셔지는 것. 좋은 여행을 배울 수 있는 날들이었다.


마구 나열한 기록. 그치만 잊지 않아야지. 그나저나 너무 푹 쉬어버려서 일상이 회복되지 않는다. 오늘은 아침에 도서관에 가서 일을 좀 하다가, 말도 안되게 오래 걱정했던 고민이 풀려버렸다. 여행의 연장선 같았다. 힘을 얻어서 짧게 출근하고 할 일을 했다. 내일은 씩씩하게 지내야지 또. 좋은 일이 올 것만 같다. 숭고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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