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집사의 삶_01.15

by 소산공원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보일러에게 문안인사를 올린다. 낮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아침에 집을 나가기 전에 에러코드 04번이 깜빡 거리는 것을 확인했는데, 자가치유를 하셨나보다. 다행이 무사히 외출에 맞는 온도를 유지해주고 계신다. 외출할 땐 보통 11-12도를 맞추어두고 집에오면 실내온도를 18도 정도로 맞춰놓는다. 낮에 햇빛이 잘 들어서 보통은 20-21도를 유지하고 해가 떨어지면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부지런히 운전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방바닥을 짚어 온기가 도는지 확인한다. 애먼 기름이 쓰일까 걱정이다. 보일러집사의 삶.

시골(추운집)에 살기 시작하면서 가장 뼈아프게 알게 된 것은 도시가스가 없는 삶과 있는 삶의 차이다. 추위도 추위지만 지갑에 드는 바람이 더 무섭다. 겨울을 잘 나지 않으면 봄 한철까지도 지난 겨울 난방비를 메우느라 고생한다. 다행히 이사할 때 3드럼을 채워두었고, 지금의 양상으론 3월 중순까지 버틸 수 있겠다. 다만 조금만 더.. 조금만 기름 채우는 날을 늦출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서천에 살 때는 생활비가 충분하지 않으니까(feat.실업급여) 늘 1드럼정도만 채울 수 밖에 없었는데 한달에 한번씩 기름차를 불러 채워넣어야했다. 난방비로 하루에 만원씩은 꼬박 쓴 셈이다.

그래도 이 집은 북면이나 서천처럼 너와집 바람은 아니다. 해가 거실과 안방까지 충분히 들어오고, 잘 때는 온수매트와 다솜이가 사준 나무인형으로 충분하다. 저녁에 테이블에서 시간을 보낼 때는 긴 팔을 잘 챙겨입고 난로와 담요면 꽤나 따스하게 지낸다. 너무 추우면 모자와 목도리를 꺼낸다. 사과나무의 겨울도 워낙 추워서 작업할 때 손이 시린 것은 조금 익숙하다. 약간 따스하다 싶으면 17도도 괜찮지 않을까 하면서 온도를 또 살짝 낮춰본다. 보일러집사의 삶은 부지런한 눈치게임. 3월 말까지 부디 애끼며 살 수 있길.


호수일지는 이제 마지막 날 하루를 남기고 있다. 거의 비슷한 매일이 반복되는 이 이야기가 왜인지 보일러&고양이 집사의 일기처럼 느껴진다. 결국 녹아버릴 섬을 쌓는 정성. 어차피 머물다갈 뿐인 세입자의 삶. 결국 나보다 일찍 떠나버릴 고양이와의 삶. 사랑하며 돌보며 사는 일들.


작년에 이 시기엔 티스토리에 일기를 썼다. 작년 오늘은 조르바가 떠나기 이틀 전의 날이다. 아픈 조르바를 일주일동안 집에서 돌보며 먹인 것, 싸는 것, 잔 것, 모든 움직임들을 다 기록했었다. 이 기록들이 남아있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조르바가 시간 단위로 움직이는 것 같다. 쏜살같은 일년이었다.


작년에는 내년 오늘이 무지 슬플 것만 같아서, 어떻게 보내나 걱정을 했는데 좀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나는 매일 조르바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사람같지만 반쯤만 맞다. 사무치게 그립지만, 나는 혼자있을 때만 가끔 쏟아지게 울고, 그냥 다른 날은 조르바를 생각하며 ㅎㅎ 웃는다. ㅎㅎ. 그건 조르바가 좋은 고양이인 덕분이겠지. 조르바 반만큼만 재밌고 따수운 사람으로 살고싶다. 생각하면 ㅎㅎㅎㅎ 재미난 일들이 마구 생각나는 사람으로 그냥 살고 싶다. ㅎㅎㅎ 가볍게. 아름답고 재미난 일들을 많이 만들면서.


그러기 위해서 내일은 졸라 열심히 일하는거다! 힘내자....




작년 어제의 일기

어제도 조르바랑 하루종일 함께 있었다.

3-4시간 간격으로 조르바 밥과 약을 챙기고 조르바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다니고 여기저기 자세를 바꿔주면서 하루를 보냈다. 점심에 밥을 차려먹고 저녁에 치킨을 시켜먹었다. 며칠 째 배달음식이다.

오늘은 새벽에 조르바 밥을 주고 집에서 일을했다. 나는 조르바 곁에서 자다가 옮겨서 한참을 잤다. 오랜만에 푹 잠을 잔 듯했다. 조르바가 힘겨워하긴하지만 마지막 상태는 아닌 것 같아서 조금은 마음이 놓인달까. 아니면 그냥 조금 익숙해져서 그런가. 이제는 눈에 보이는 곳에 있지 않아도 10분에 한번정도 체크하고 있다.

하루에 5끼를 먹는데 그 중에 3끼는 약을 먹인다. 밥을 먹일 때는 괜찮은데 약을 먹일 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게 어렵다. 밤에 잘 때 조르바가 어디있나 살피느라 잠을 설치고 새벽에 일어나서 밥을 먹인다. 애기를 키우는게 이런 느낌일까? 사실 이런건 하나도 힘들지 않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일 같다. 조르바 밥을 먹이고 좀 전에는 화장실에서 배 마사지를 해주었는데 아랫배가 똥으로 가득 차 있다. 배를 만져주고 똥이 한덩이 정도 빠져나왔다. 화장실에 있을 때 자주 해줘야겠다. 수요일쯤에 컨디션이 괜찮으면 상의해보고 수액하고 변비에 필요한 약을 받아놓아야겠다.

아직도 판단이 잘 안 서는데, 장례식에 필요한 액자를 주문해야할지 간에 좋은 약을 주문해야할지. 둘 다 아까워서 그런게 아니라 뭘 해도 후회할 것만 같아서 선택하기가 어렵다.

낮에는 눈이 펑펑 왔다 조르바가 침대방 창문에 올려달라고 쳐다보길래 올려줬다. 니나와 침대에서 명상 음악을 틀어놓고 한참을 잤다. 자고 난 후에 또 곁에 누워있으니까 조르바가 발을 베고 누웠다. 같이 눈오는 걸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작년에는 석천리에서 같이 눈을 봤다. 이렇게 오래 오래 눈을 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다른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서 괜찮은데 조르바랑 침대에 누워있을 때, 조르바가 내 팔을 베고 누울 때는 자꾸 눈물이 난다. 씩씩해야지 다짐했는데 참아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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