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일을 들고 오지말자! 는 생각으로 조금의 늦은 퇴근을 했다. 밥을 시켜먹을까 하다가, 끼니를 상차림으로만드는 습관을 없애볼까하여 편의점에서 달걀을 사먹었다. 달걀만 사러 갔던 편의점을 어슬렁 거리면서 새로운 맥주를 발견. 놓칠 수 없어 밥보다 더 큰 맥주를 사고 돌아와 조금 더 일을 했다. 맥주를 사놓은 채로 일을 하니 설레는 마음! 좋은 발견.
집에 와서 일을 하지 않겠다 생각하니 홀가분하다. 다행히 보일러도 무사했다. 따뜻한 물로 씻고, 잔을 얼리고 궁금했던 맥주를 마셨다. 리투아니아(대체어디?)가 원산지인 볼파스엔젤맨이라는 맥주. 같은 시리즈로 IPA와 라거 두종류가 있어 사보았다. 조급하게 얼린 잔에 IPA를 먼저 먹었다. 상쾌하고 씁쓸한 맛. 사실 디테일한 맛 표현같은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다.
올해의 기록 키워드 중 하나는 '보고 마신 것'. 본 것은 대체로 책과 드라마일테고, 마신 것은 맥주와 기타 등등의 술.. 일테니 맥주와 책을 주로 쓰게 될 것 같다.
맥주 기록의 목적은 맛의 디테일이 아닌 카테고리를 만드는 것. 그동안은 '먹어도 되는 것'과 '다신 사지 말아야할 것'정도의 큰 카테고리가 있었다면 앞으로 조금 진지하고 진중한 분류를 해보고 싶었달까. 이를테면 금요일의 맥주, 매일 마시고 싶은 맥주, 애인과 마시고 싶은 맥주, 친구들과 싸게 많이 먹고 싶은 맥주, 기념일의 맥주, 책과 어울리는 맥주 등등등.... 이렇게 적고 보니 너무나 아름다운 목록이다. 더 마시고 싶네......
요새 맥주를 고르는 것과 더불어 조금 고민하는 것은 그날의 잔을 고르는 것이다. 보통은 하루에 하나의 잔만 썼는데, 얼마전 친구에게 맥주에 어울리는 잔을 찾아 먹는 것의 즐거움을 배웠다. 패키지 디자인과 맛, 컬러감을 고려한 적절한 페어링...그리고 그것을 알맞은 타이밍에 얼려놓는 것. 맥주 한 캔 마시는데 이렇게 즐겁고, 부지런해야하는 일이라니, 새삼 인생 너무 재밌다.
첫 잔으로 볼파스엔젤맨 뉴 잉글랜드 아이피에이를 마시고, 두번째로 볼파스엔젤맨 호피 라거를 마셨다. IPA를 먼저 먹으니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그치만 생각해보니 사실 맥주는 언제까지,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최선을 선택해야 옳은 게 아닐까. 초밥처럼 다음 코스를 계획해놓고 먹지 않으니깐 말이다. 언제나 '이것만 먹고..구만먹어야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여튼 멈추지 못한 채 3캔 째 먹으며 호수일지도 읽고, 일기도 쓰면서 친구가 놓고간 '맥주와 나'라는 책을 읽었다. '맥주와 나'라니. 청첩장의 제목 같다. 맥주와 어울리는 안주의 레시피가 담긴 책인데, 그보다는 맥주를 맛나게 먹기 위해, 맥주를 마시는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한 시간들의 기록같다. 때에 맞는 맥주를 고르고, 어울리는 잔을 얼리고, 적절한 메뉴를 골라 미리 준비해 초로록 자신만을 위한 안주를 차리는 삶...
몇 장 읽지도 않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파를 굽고 있다. 은은한 불에 기름을 덮히고 파 한쪽을 올려 천천히 굽고 엄마가 준 고추짱아찌 간장을 뿌렸다. 일기를 쓰고 3번째 잔을 까며 '파 어디갔지?' 한다. 오늘은 3캔으로 족한 노곤함이다. 이제 씻고 내일은 비가 오니까.. 막걸리를 먹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