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술-호수일지_01.16

by 소산공원

보일러

무지막지한 야근을 하고 헐레벌떡 집에와 보일러에 문안인사를 드린다. 12도에 맞추어놓고 나갔는데 14도. 보일러님의 열일 덕분이겠지. 아무튼 집은 사과나무보다 따뜻하다. 그걸로 대만족이다. 후다닥 씻는데 따순물이 잘 나오다가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다. 하마터면 이새끼 저새끼 할 뻔했다. 다행히 비눗칠을 하지 않는 습관덕에 목욕을 끊고 세수만 하고 나온다. 이가 덜덜 떨렸지만 온수매트님이 있어 괜찮다. 잠시 안겨있었다.


오늘은 맥주가 (다먹어서)없으니 버팔로를 마신다. 낮에 그로서리차차에서 사온 그리시니랑 같이. 그리시니는 맥주에도 위스키에도 와인에도 먹기 좋은 안주다. 이 부랜드는 소금과 로즈마리맛이 조금 강하다. 퀼리 올리브랑 토마토가 그려진 맛이 좋은데 가끔 편의점에서 발견하면 사다 먹는다. 이제는 과자봉지만 봐도 안주가 되기 적합한 것들을 딱 알아챈다. 거의 90프로 이상의 성공률!


호수일지

호수일지의 필사를 끝냈다. 찬찬히 읽고보니 책날개에 있는 말을 아주 쬐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때로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고 때로는 견고히 쌓아올린 돌탑 같은 예술의 시간을 담습니다. 언어의 몸에 새긴 기록이 다른 매체의 부속물이 아니라 온전한 작품으로서 독자와 만나, 예술의 존재 의미를 묻는 또 다른 시간의 문을 열어주기를 꿈꿉니다.'


언어의 몸, 시간의 문. 이 일지를 읽다보니 지난 10월 온양민속박물관 구정아트센터에서 본 일상의 기록 전시가 떠올랐다. 왼쪽 공간엔 매일 같은 시간에 곡교천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그날의 습도, 온도 같은 것들을 적어둔 전시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냥 이런 것도 전시를 할 수 있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오른쪽 공간에 있는 에에올을 닮은 삐뚫어진 동그라미 사이를 왔다 갔다 지나가던 했던 기억. 이상하게도 내내 그 장면이 떠올랐다.


작가들 인스타를 찾아보니, '연결점'이란 이름을 가진 작품이다. 비슷한 주제지만 다른 형태의 작품들이 꽤 있다. 전시관이나 도록에 짧게 적힌 작품 소개를 읽으면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데 호수일지를 책을 읽고 난 이후에 날개에서 발견한 '언어의 몸'이란 단어와 친구들과 '왔다갔다'했던 장면들을 생각하면 뭔가 어렴풋이 알 것만도 같다. 곡교천의 30일 호수의 22일의 기록. 10월의 온민박. 이 순간들의 동시에 열린-연결된 시간의 문을 상상해본다. 예술의 존재의미.. 이런걸 알고 싶은 건 아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세계의 덩어리를 품은 느낌이다. 이 감각이 열리면 좋고 재미있는 것들을 더 많이 보고 읽고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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