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
무지막지한 야근을 하고 헐레벌떡 집에와 보일러에 문안인사를 드린다. 12도에 맞추어놓고 나갔는데 14도. 보일러님의 열일 덕분이겠지. 아무튼 집은 사과나무보다 따뜻하다. 그걸로 대만족이다. 후다닥 씻는데 따순물이 잘 나오다가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다. 하마터면 이새끼 저새끼 할 뻔했다. 다행히 비눗칠을 하지 않는 습관덕에 목욕을 끊고 세수만 하고 나온다. 이가 덜덜 떨렸지만 온수매트님이 있어 괜찮다. 잠시 안겨있었다.
술
오늘은 맥주가 (다먹어서)없으니 버팔로를 마신다. 낮에 그로서리차차에서 사온 그리시니랑 같이. 그리시니는 맥주에도 위스키에도 와인에도 먹기 좋은 안주다. 이 부랜드는 소금과 로즈마리맛이 조금 강하다. 퀼리 올리브랑 토마토가 그려진 맛이 좋은데 가끔 편의점에서 발견하면 사다 먹는다. 이제는 과자봉지만 봐도 안주가 되기 적합한 것들을 딱 알아챈다. 거의 90프로 이상의 성공률!
호수일지
호수일지의 필사를 끝냈다. 찬찬히 읽고보니 책날개에 있는 말을 아주 쬐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때로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고 때로는 견고히 쌓아올린 돌탑 같은 예술의 시간을 담습니다. 언어의 몸에 새긴 기록이 다른 매체의 부속물이 아니라 온전한 작품으로서 독자와 만나, 예술의 존재 의미를 묻는 또 다른 시간의 문을 열어주기를 꿈꿉니다.'
언어의 몸, 시간의 문. 이 일지를 읽다보니 지난 10월 온양민속박물관 구정아트센터에서 본 일상의 기록 전시가 떠올랐다. 왼쪽 공간엔 매일 같은 시간에 곡교천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그날의 습도, 온도 같은 것들을 적어둔 전시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냥 이런 것도 전시를 할 수 있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오른쪽 공간에 있는 에에올을 닮은 삐뚫어진 동그라미 사이를 왔다 갔다 지나가던 했던 기억. 이상하게도 내내 그 장면이 떠올랐다.
작가들 인스타를 찾아보니, '연결점'이란 이름을 가진 작품이다. 비슷한 주제지만 다른 형태의 작품들이 꽤 있다. 전시관이나 도록에 짧게 적힌 작품 소개를 읽으면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데 호수일지를 책을 읽고 난 이후에 날개에서 발견한 '언어의 몸'이란 단어와 친구들과 '왔다갔다'했던 장면들을 생각하면 뭔가 어렴풋이 알 것만도 같다. 곡교천의 30일 호수의 22일의 기록. 10월의 온민박. 이 순간들의 동시에 열린-연결된 시간의 문을 상상해본다. 예술의 존재의미.. 이런걸 알고 싶은 건 아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세계의 덩어리를 품은 느낌이다. 이 감각이 열리면 좋고 재미있는 것들을 더 많이 보고 읽고 느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