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눈, 눈꽃 - 01.28-29

by 소산공원

하다하다 침대에 누워서 일기를 쓴다. 집을 하루 비우는동안 여러번 보일러 생각을 했다. 오자마자 보일러의 안녕을 확인한다. 지독한 사랑... 분명 온돌 41도(최저 40도)를 맞춰놓고 집을 비웠는데 왜 집이 따뜻하지... 집이 따뜻하면 따뜻한대로 걱정.. 차면 찬대로 걱정....


구례에 또 다녀왔다. 용주샘이 늘 얘기하시던 요코가와 미노루 선생님이 한국에 오셔 함께 여행을 했다. 미노루 선생님은 유니콘같은 존재.. 몽골이자.. 서몽골같은.. 빠짐없이 대화에 등장하지만 또 나만 모르는,. 그런 존재였는데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게다가 여행을, 게다가 구례를, 게다가 화엄사를 함께 여행하다니. 기쁜 일이었다.


날씨가 화창하더니만 연곡사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살랑살랑 천천히 내리는 눈. 그런 눈을 일본에서 '꽃눈'이라 부른다고 말씀해주셨다. (나중에 정정하셨는데 그건 까먹음..) 우리에게 꽃눈은 꽃에게 붙여주는 이름인데. 마침 매화 꽃눈이 망울망울 달려있었다. 눈이 제법 내리기 시작했다. 아랫지방엔 눈이 잘 오지 않는데, 몇 해만에 보는 큰 눈이라고. 눈이 와서 그런지 연곡사는 유독 고요하고 조용해서 좀 외로운 느낌까지 들었다. 작은 절이었는데 정교하고 아름다운 탑이 많았다. 아, 탑을 세는 방법을 배웠다! 왜 3층 석탑이라고 써져있는데 5층인지,, 저것은 10층 석탑이구나 하고 보면 9층 석탑이라하는지.. . 도대체 뭔지 늘 의아했는데 마침내 방법을 알게 되었다!


차로 이동하는 중에는 날이 개었다가 화엄사에 들어서니 또 영화처럼 눈이 내렸다. 눈 내리는 화엄사에서 법고를 또 보다니.... 해가 길어져서 법종까지 다 마쳐도 해가 남아있었다. 그건 또 그대로의 멋이 있었다. 사사자탑에 올라 눈쌓인 화엄사를 보면서 종소리를 들었다. 그러보니 11월부터 한달에 한번은 화엄사에 왔다. 올 때마다 기도들이 조금씩 달라졌다. 저녁에는 원기옥을 모으던 형제봉주막에 가서 술을 마셨는데 주인장이 친한척을 하더니만 급기야는 쿡쿡 찌르며 선을 넘어버렸다. 왜 이렇게 몇몇의...많은... 아저씨들은 지보다 어린 여자들을 만만하게 대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일까. 좋아하는 공간 하나를 또 잃었다. 바이바이...


그렇지만 좋은 식당을 두 군데나 찾았고, 새로 궁금한 곳도 생겼다. 봄에 또 와서 섬진강을 걸어야지.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요샌 100살까지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해야할 것들, 하고픈 것들이 너무 많다. 미노루상은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배우고픈 일들을 끊임없이 찾아 해내셨단 얘기를 들었다. 꽉 찬 여행일정에 고단하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들었는데, 단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자리에 계셨다. 내가 74살에도 저렇게 씩씩하게 사성암에 오를 수 있을까? 좋아하는 탑과 절과 순간들을 사진에 담고 싶어할까? 나이어린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혼자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으면서 재밌는 말을 뱉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오래 유니콘을 만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100살까지만 사셨으면 좋겠다.


여행에서는 되도록 일기를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유독 말과 단어들이 풍성했던 여행이라 부지런히 기록해두지 않은 것이 조금 아쉽다. 배운 것이 너무 많다. 설중매, 식혜와 식해, 탑 세는 법, 원숭이 미끄럼나무, 매화가지를 꺾는 것, 활공장, 또 뭐가 있더라...



지지자유무궁의. 피고 지는 꽃이라지만 그저 덧없이 지는 존재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꽃잎 한 조각 떨어져 날려도 봄기운이 그만큼 깎여 나간다는 두보의 시구처럼 꽃잎 하나 없어져도 이 골짜기의 봄빛이 출렁할 터이다. 가지에서 떨어져나와도 마구 흩어지지 않고 나무 아래를 배회하는 것도 느리게 지는 한 방법이란다. (...)

"지지자유무궁의. 더디오 느림 속에 무궁한 뜻 있으니, 지지자유무궁의." 계속 중얼거리며 그 뜻을 매만졌다. 그리고 매화가 더디게 지듯 나도 더디게 살아가는 방편이 혹 뭐 있을까 궁리해 보기도 했다.

<나무와 돌과 어떤 것,이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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