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오랜만 _23.2.13

by 소산공원

아침에 8시 반쯤 일어났나? 저녁을 안 먹어 속이 편안한 채로 깼다. 아침부터 걷고 싶어 눈 뜨자 마자 애인을 졸라 산책을 갔다. 매일 차를 세워두는 길목 위 얕은 산이 궁금하던 차였다. 보광사 쪽으로 올라가니 마땅한 산책로는 없고 폭신하고 정돈되지 않은 흙 길이 있다. 언덕 위를 오르니 넓은 배 밭이다. 배 밭은 건너니 구성동 극동 아파트와 연결되었고 그 사이에 청수동 우리 동네로 이어지는 샛길이 있다. 샛길을 따라 골목 탐험을 했다. 골목 끝을 차지하는 유독 넓은 마당을 가진 집이 배 밭의 주인인 듯하다. 좁은 골목 사이로 오래 된 집, 비어서 쓰레기가 가득한 집, 불에 타 버린 집들이 요상하게 다닥다닥 붙어있다. 잘못 들면 누군가의 집 앞에서 길이 끝나버리지만 워낙 좁은 동네라 길을 잃어버릴 걱정은 되지 않는다. 정돈되지 않은 고불한 골목에도 얼어버린 텃밭과 화분이 있다. 봄이 되면 지어질 농사의 풍경이 궁금하다.

이사 온 동네는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와 오래된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있어 도시의 편의를 누리면서도 골목의 낡은 정취를 누릴 수 있는 좋은 동네다. 산책로도, 좋아하는 카페도, 편의점도 가깝다. 고칠 것도 많은 이 집에 사는 일엔 심심할 틈이 없다. 애인은 이 낡은 집을 나서면서도 ‘삶의 질이 너무 높다’라고 말했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선 혜빈이가 만들어준 카레와 엄마가 보내준 달걀로 달걀말이를 해 먹었다. 그리고 또 잠시 낮잠을 잤다. 삶의 질. 더 좋은 삶은 어디에 있는 거지.

엊그제인가, 치앙마이에 있던 뮁과 전화를 나눈 순간이 떠올랐다. 거울을 봤는데 갑자기 산소가 생각나서 전화를 했다며. 뮁가 함께 있던 친구들에과 인사를 나누고, 하루종일 너무 좋아서 울었다는 뮁과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 받았다. 그 다정함에 푹신 젖어 혼자 침대에서 훌쩍 훌쩍 울면서 만화책을 보다 잠을 잤다. 좋은 삶, 고마운 삶. 다정함, 다정함을 중얼거렸다.

토욜엔 혜빈이랑 가혜가 집에 와서 밥 먹고 수다 떨다 갔다. 나름 오랜만에 만났는데 안 본 사이 둘다 며칠이나 아팠다고들 했다. 2월은 원래 힘든 거라고. 긴 겨울 때문에 지치기도 하고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시기라 그렇다는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가혜가 올 핸 윤달이 끼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좋을 때라 했다. 윤달은 귀신이 없는 달이라 방해를 덜 받는다고, 특히 윤달에 윤일이 끼었는데 그게 4월 19일이라며. 4월 19일엔 뭐라도 해보자는 다짐을 나눴다. 찾아보니 약간의 나쁜 짓(?)을 해도 괜찮을 시기 같이 느껴지는데, 그런거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긴다. 좋고 새롭고 흥미롭고 위험한 무언가!

오키나와에 다녀온 후로 집에서 일을 하고 있다. 추운 사과나무보다 덜 추운 집으로 에너지를 집중시키려고 컴퓨터도 싹 들고 와부렀다. 아침출근과 끼니, 퇴근 시간의 규칙을 잘 지키면서 2주를 보내고 싶다. 좋고 새롭고 흥미로운 무언가를 위해 안정적으로 따뜻함을 유지하는 힘.

오키나와에 대한 글을 쓰고 싶은데 잘 안된다. 비일상을 쓰는 건 좀 어렵다. 그것보단 일상을 유지하지 않은

채로 비일상에서 발견한 것을 말하기가 어렵달까. 사진이라도 주욱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새는 노션에 여러 습관을 기록하고 짧은 일상을 남긴다. 필사는 2-3일 주기로 하게 된다. 봄이 오면 좀 더 단단하게 기록을 여미고 싶다. 일단은 2월은 무사한 것이 목표. 낼은 도서관에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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