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째 일터!
이직을 했다. 4번째 일터를 옮기며 떠남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결국 내가 거쳐왔단 일터들을 말하고 싶어졌다.
일을 한다고 부를 수 있는 첫 터전은 대안학교였다. 대안교육을 경험하며 활동비를 받는 인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의 활동비도 받기 민망할만큼 한 일이 없었고 많이 놀았다. 수업과 여행에 함께하고 아주 가끔 한 두시간 프로젝트를 꾸렸다. 일이라고 하기에 나는 학생의 위치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민망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충분하게 경험할 시간을 준 덕분에 내 삶의 모양이 크게 변했다.
다르게 생각하는 일, 실제로 그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대학을 다니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는 것을,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 지 힌트를 얻었다.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은 주제에 어찌 1년을 지내고, 헤어질 12월이 되자 1일부터 속상했다. 이 좋은 사람들의 곁을 떠나게 되다니. 이렇게 사랑하는데 헤어져야한다니. 허나 서울이란 터전은 나에게 맞지 않고 나는 동네에서 내 살 길을 찾아야했다. 눈물의 졸업식을 뒤로 하고 살던 천안으로 돌아왔다.
월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임금을 받고 일한 곳은 사과나무였다. 디자인에 대해서는 1도 모르는(정확한 표현)나와 함께 사무실을 꾸리겠다며 제안한 일자리는 사실은 처음엔 매력적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천안에는 내가 갈 수 있는 자리가 없었고, 누구나 가고싶어하는 자리라는 얘기에 혹해 일을 시작했하게 되었다. "텍스트를 많이 읽을 수 있어서 편집디자이너는 좋겠다"라는 가당찮은 말을 했던 내가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장님의 기다림 덕분이었다. 학원 한 번 다녀본 적 없던 무지랭이인 내게 일을 맡기고, 꼬박꼬박 월급을 주며 내 성장의 곁에 있어주었다. 이 고마움은 진부하지만 정말 말로 표현하긴 어렵다.
디자인은 경험해보니 나에게 어느정도 맞는 일이었고, 내가 꽤나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디자인노동자로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상상해본 적 없는 직업이었지만 디자인을 매개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지역에 사부작 발을 딛을 수 있었다. 호두와트를 함께 만들게 된 것도, 여러 시민단체나 협동조합에 가입하게 된 것도 사과나무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삶터에서 관계를 확장해나가면서 함께할 동료들을 만났다. 처음으로 몸에 맞는 옷을 입는 기분이었다. 내내 행복하고 튼튼했다. 사과나무는 앞으로도 나의 기둥과 나무같은 곳이다. 내가 어느 곳에서 나이테를 쌓아도 사과나무의 결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믿고싶어)
창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첫 일터는 허송세월이었다. 사실은 이 좋은 사과나무를 떠나게 된 이런 저런 사연들이 있겠지만, 삶은 이런저런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말을 거니.. 나는 세계최고의 일터인 사과나무를 떠났다. 다음 일터는 마치 우연히 지나쳤는데 알고보니 버킷리스트의 여행지 같았던, 책방이었다. 책방을 연 큰 연유는 지금 생각해봐도 없고, 원도심이었던 이유는 더더욱 없고, 사실은 나는 포장을 하는 능력이 아예 없는 사람이라 이유와 포부를 꾸리기엔 여전히 간지럽다. 그래서 그만큼만 일했고 그만큼 게을렀다. 먹고사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정말 먹고사는 일을 충실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러기에는 내 먹고사는 일의 능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나는 1년 6개월정도의 시간을 겨우 버티며 시간을 태웠다. 공사의 기술을 익혔고 공간을 나누는 법을 조금 배웠다. 책방의 색들과 냄새들이 마치 내 색인 듯한 날들이었다. 행복했지만 미안한 마음을 빚 지우고 책방을 넘겼다. 후련했다.
먹고사는 일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첫 일터는 사회적협동조합우리동네였다. 늦겨울의 긴 비수기를 거치며 몸과 지갑이 피폐해질 때, 지역에 빌 붙고 있던 협동조합에서 디자인사업으로 함께 일하기를 제안받았고, 셔미의 제안은 늘 꿀떡같아서 삼켰다. 그리고 2년 4개월 남짓 일을 했다. 내 삶에 폐가 되는 것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공동체에 폐 끼치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을 끌어모아 조금 열심히 했다. 공동체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일의 동기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러 솜씨 좋은 사람이 모인 덕에 '일 잘하는 법'을 매일 배웠다. 내가 나중에 조금이라도 난 체 할 수 있는 것은 이 시간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경험도 특별했다. 게다가 협동조합이라니! 협동조합은 "민주적 의사결정"을 토대로 한다고 했다. 우리동네는 "민주", "적", "의사", "결정"의 단어만으로 한 달을 넘게 얘기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많이 말했고, 많이 들었고, 많은 것을 목격했다. 예전 대안학교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문제를 마주하는 과정이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공동체가 만나고,소통하고 대화하는 방식은 그 공동체의 전부와 같다. 협동조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삶과 사회를 대하는 태도를 진지하게 배웠다. 아 사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것이구나.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북적거리며 많이 배우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디자인노동자의 삶은 힘들었다. 11월과 2월 사이의 성수기를 견디며 다신 이 겨울을 보내지 않기를 매년 바랐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일한다' 라는 말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일을 좋아한다고 포장할 수 없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살아내는 건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이주를 꿈꾸며, 연말까지 내가 다른 일을 탐색해보기로 결심했다.
삶은 늘 그렇듯 마음먹은 속도대로 제안하지 않는다. 다른 일을 탐색해보기에 좋아보이는 일이 들어왔고, 나는 조직의 배신자가 되어 서천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 곳의 시간은 아직 글에 닿기엔 어렵다.
그렇게 2년 4개월만에 또 퇴사를 했다. 8년의 짧은 일의 경험에서 3번의 퇴사는 자랑스러운 이력은 아니다. 나는 게으르고 , 어쩔 수 없는 일에 고집부리지 않는 사람이다. 끈기로움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사실 가장 부럽다.
다만 나는 모험하는 사람에 가깝다. 충분한 선택과 충분한 고려없이도 탐험하는 시간들을 보내겠지만, 그 시간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사람일 것이다. 삶은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말을 거니까. 이 모든 모험들이 쌓이는 모양을 상상한다. 다르게 얽히고 연결된 것들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시간들로 채워지기기를, 서로의 테를 넓혀나가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