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지의류_3.4

by 소산공원

겨울을 보냈더니 인스타 피드가 어두침침하다. 내일은 경칩이라고 하니까 밝은 초록색을 깨워야지.

몸이 곤한 것에 비해 잠을 잘 잔다. 꽤 개운하게 일어나고 중간중간 짧은 낮잠으로 채운다. 새로운 몸의 리듬을 배워가는 것 같다.


오랜만에 일요일 오전 약속이 생겼다. 작년 보통의 혁신가 인터뷰를 통해 만났던 분인데, 좋은 기운을 전해 받은 사람 중에 하나이다. 나와 비슷한 일을 하면서 다른 관점과 새 마음으로 일을 대하는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한다. 그치만 돌아보니 음청 투덜거리면서 원래 이 업계가 그런 것이라며 고인물처럼 굴고 온 것 같다. 쓰는 와중에도 약간 창피해졌다.


아무튼 만나기로 시간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서 원성천을 어슬렁거리다가 궁금했던 목욕탕 구경도 하고 매화도 봤다. 벚나무에 빼곡히 꽃망울이 맺혀있다. 며칠만 있으면 꽃이 핀다는게 잘 믿어지지 않았다. 카페에 들어가 기다리는 사이 잠깐, 모랭이숲에서 산 김초엽의 '책과 우연들'을읽었다. 나는 아직 김초엽의 이전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는데 이 책은 이전의 책들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가에 관한 책이었다. SF소설을 쓰기 전에 어디에서 소재를 발견하고 어떻게 그러모아 쓰게 되었는지. 아무튼 재밌는 것은 방법론적인 것보단 주제의 건더기들이었다.


'공생이 자연의 중심원리라면, 개체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 것일까. 이런 연구를 하던 과학자들도 꽤나 혼란을 겪었는지 결론은 기이한 질문 앞에 다다른다. 우리가 현대성의 상징으로 믿어온 개인, 개체성이 실은 명확하게 존재한 적 없다면?

-자,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 그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개체는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의류입니다. - 멀린 셀드레이크 『작은 것들이 맏는 거대한 세계』중에서"-


토요일에는 지의류인 채로 감자를 심으러 다녀왔다. 작년에 처음으로 감자를 심으러 가서 감자밭 오바로크 전문가.. 이런 말을 들었는데 아무튼 디자인이 예뻐요, 라는 말보다 훨씬 듣기 좋은 말이었다. 올해는 '감자가 체질'이란 얘길 들었다. 모두가 약간은 진흙인 밭에 엉겨서 감자 심기를 마치고, 옥상에서 불을 쬐며 쉴 새 없이 배를 채웠다. 공룡의 친구들은 연대가 체질인 것 같다. 설해 샘은 일년 중에 이렇게 친구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 감자농사의 시간이 가장 좋다는 얘기를 했다. 아픈 몸으로 근육아 찢어져라 일하고도 친구들에게 대접할 수 있어 좋다는 말을 어찌 그렇게 맑은 얼굴로 할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한 일이다. 그런 환대가 계속되는 연결과 띠를 만들어내는 거겠지. '우리는 모두 지의류입니다.'


이 일기를 쓰면서 또 '지의류'란 단어를 검색해보았는데 온통 '~이 아니다(ex.버섯이 아니다, 식물이 아니다)'라는 말만 나온다. 지의류는 ‘뭐뭐이다'라는 보단 ‘뭐뭐가 아니다'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이 조금 더 적합하단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지의류처럼. ‘뭐뭐가 아닌’ 채로 선명해져야지. 그런 연결과 고리 안에서 경칩을 깨워야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새 마음으로_3.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