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맛보기. 올 들어 처음으로 반팔을 입었다.
오늘은 한 달도 전부터 벼르던 날이었다. 가혜가 알려준 윤달 윤일. 무슨 의미가 있는지 기억도 못하면서 달력에 체크를 해두고 괜히 이 날을 오래 기다렸다. 뭔가 새로운 시작을 하기 가장 좋은 날이라니! 그렇지만 이런 날 즐겁고 싶다는 생각이 숨 막히게 한다.(feat.권나무'노래가 필요할 때') 머리에 쫑알쫑알 생각이 많다가 결국 늘 가던 길을 산책하고 늘 가던 카페에 갔다.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평범한 밥을 먹었다.
당근에서 자전거 하나를 사서 원성천에서 유량동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갔다. 기분좋은 봄 단풍. 볕과 바람이 좋았다. 돌아오는 길엔 정컾에 들러 아아메를 마셨다. 이 창문 자리에서 봄의 벚꽃과 여름 나무들. 눈이 펑펑오는 기억까지 사계절을 다 갖추었다. 이제 이 공간에 올 수 없다니 서글픈 일이다. 볕이 좋은 날에, 혼자 놀고 싶은 오후에 몰래 기어들어가 조용히 놀고 싶은 아늑한 방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다. 흑흑흑... ... ... ...
집에 돌아오자마자 거실 옆 베란다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낮의 열기가 조금 꺾이면서 단 바람에 멀리 큰 나무들이 움직였다. 낡은 건물들이 층층 쌓인 창문을 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아! 올해 첫 베란다 데뷔! 여름과 베란다와 맥주와 내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
여름을 잊어서 여름을 또 기다린다. 잘 잊어서 좋아하는 것들이 많다.잊어버릴 땐 지우개로 맨살에 스윽이 아니라 감자싹처럼 칼로 도려내듯 잊는다. 울퉁불퉁하게 상처난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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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라는 말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아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 같은 것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 같은 건 없다
식탁 위에는 싹이 난 감자 한봉지가 놓여 있을 뿐
저 감자는 정확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싹이 아니라 독이지만
저것도 성장은 성장이라고
초록 앞에선 겸허히 두 손을 모으게 된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바라본다
하지만 싹은 쉽게 도려내지는 것
먹구름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흐린 것은 흐리고
도려낸 자리엔 새살이 도는 것이 아니라
도려낸 모양 그대로의 감자가 남는다
아직일 수도 결국일 수도 있다
숨겨놓은 조커일 수도
이미 잊힌 카드일 수도 있다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로
오늘을 살아간다
여전히 내 안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내가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내가
스페어_안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