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사과나무에 무려 인턴이 왔다. 진하를 통해 알게 된 친구인데 마치 점지된 것처럼 알맞은 시간에 잠시 지내게 되었다. 나는 이제 좀 자연스럽게 어른인체 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일할 때마다 ‘하기 싫어 죽겠네’ 라고 튀어 나오는 말들을 꾹 누르고 참았다. 10대와 대화를 해본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인데, 이런 질문을 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할까요, 잘하는 일을 해야 할까요?’
나도 20살 무렵에는 그런 고민을 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고민을 하다가 많이 좋아하지도, 많이 잘하지도 않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적당히 잘하는 일을 적당히 좋아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전히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일도 없지만, 일하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알게 되었다. 내 밥벌이를 하기 위해 생활력을 갖추는 것,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 귀 기울여보는 것, 정해진 일정 안에서 시간을 꾸리는 것은 어른이 되고 일을 하면서 겨우 배우게 된 것들이다. 내 동료들에겐 이 일을 한 덕분에 겨우 사람 구실을 하며 산다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일이든, 잘하는 일이든 나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을거라고, 나를 해치지 않는 일이라면 다 괜찮을거라고 나의 20살에 무렵에게 대답하고 싶었다. 시간은 아주 아주 많다고. 그런 뻔하고 알 수 없는.
집에 와서 밥을 먹다 말고 하늘을 보러 올라갔다. 하늘에 온갖 색이 다 묻어있었다. 살점에 묻은 멍 같은 보라, 빨강. 누렇고 노리끼리한 노랑, 먹이 짙은 파랑, 머리 위로 흘러가는 먹구름,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 옅고 짧았던 무지개. 무지개. 단 한 장 남은 필름 사진을 찍었다. 근사한 하늘을 보고 나니까 또 풍요로운 마음이 인다. 오랜만에 안희연 ‘단어의 집’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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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역할은 모든 존재의 ‘기저선’을 그리게 하는 일 같다고. 기저선은 내가 무척 아끼는 단어 중 하다. 심리학 용어로, 처지(치료)에 앞서 긋는 선을 일컫는다. 행동을 수정해나가기 전 기초선을 먼저 측정하는 것이다.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지금 내 삶이, 슬픔이, 영혼의 두 발이 어디에 있는지 금을 긋고 바라보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내가 어디로 얼마만큼 왔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미술 치료에서는 ‘공간을 구분하는 기준선’을 뜻하기도 한다. 기저선을 긋는 순간 땅이 생겨난다. 자연히 선 위는 하늘이 된다. 백지 위에 선 하나를 그었을 뿐인데 공간이 생기고 시간이 열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목표는 출발이다. 뒤돌아보지 않고 가는 것이다. 이전과는 다른 내가 되기 위해서, 슬픔을 잊기 위해서, 자유로워지려고, 기억을 붙들고 싶어서… 각자의 출발 요인은 전부 다를 것이다.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도, 세계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장면도 전부 다르겠지. 그러나 기저선을 그어두었으므로 우리는 알 수 있다. 내가 이렇게나 멀리 흘러왔구나. 아니구나, 저 주홍글씨 같은 선으로부터 한 걸음도 멀어지지 못했구나. 뒤돌아보면, 파도에 쓸려가는 발자국 들.
기저선을 긋는 손. 점멸하는 불빛 같고, 물 위에 놓인 꽃잎 같은. 그 손은 익숙한 슬픔으로부터 왔다. 살아 있다는 이유로 필연이 되는, 그 흔하디흔한 슬픔으로부터.
안희연 ‘단어의 집-기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