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플레이어를 샀다. 이 CD플레이어를 사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지는 10년이 넘었다. 10년이 넘은 물욕을 간직하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이상한데, 실현시키지 않고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한국 웹툰의 데본기 시절에 즐겨보던 마린블루스란 만화가 있다. 성게군의 잘 꾸며진 집과 거실엔 무인양품의 벽걸이 CD플레이어가 걸려있었다. 고등학교 3년과 대학 초반, 그야말로 자아가 폭발하던 시절에 나는 늘 웹툰작가나 문인들, 지금의 말로 하자면 그 시대의 인플루언서을 동경해왔다. 어른이 되고 돈을 많이 벌면 꼭 저렇게 멋지게 살아야지. 언젠간 나도 멋진 스쿠터를 타고 다녀야지, 고양이를 키워야지, 집을 멋지게 꾸미고 살아야지.
20살이 넘어선 돈을 버는 일을 쉬어본 적 없었으니, 나는 벌 때마다 근근히 스쿠터를 사거나, 여행을 가고, 집을 꾸미는 일에 돈을 썼다. 고양이를 키우는 일은 다른 질감의 일이었지만 아무튼 그 시기에 형성되었던 어떤 '멋진 것'은 삶과 소비에 있어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이 CD플레이어는 가난과 로망의 중간 정도에 있었다. 로망은 있었지만 가난의 주제과 욕망의 크기를 아는 덕분에 CD를 사기 시작하면 한도끝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사고 싶지만, 이걸 사게 되면 한도끝도 없이 CD를 사고 싶을거야, 그럼 난 한도끝도 없이 가난해질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합리적이지 않은 생각이지만 아무튼 유야무야 미루어왔던 것이 10년이 되었다. 그 시간동안 소리바다에서 음원을 불법 다운로드했던 MP3의 시대, 싸이월드 도토리의 시대는 사라지고, 스트리밍 음원의 시대가 도래했다.
음원의 시대에 나는 주구장창 멜론을 들었다. 멜론을 이용한지는 8년이 되었다. 8년동안 돈을 냈단 얘기다. 덕분에 멜론에선 VVVVVVIP라는 대우를 받았다. 한번도 누린 적은 없으나 그 누구도 나를 그렇게 대우해주지 않기에 아무튼 긍지를 갖고 한동안은 멜론을 이용했다. 가수의 이름과 음악의 제목, 앨범의 커버이미지를 뚜렷하게 알고 있는 것이 좋았다. 비록 8년 전의 선곡을 반복할 지라도 내가 선곡한 음악으로 플레이리스트를 꾸리는 것은 일종의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UI와 정말 낡고 낡은 것들로 너덜해진 플레이리스트가 지겨워지기 시작했을 때. 멜론이 4400원에서 8800원으로 마침내는 10000원이 넘어선 서비스 비용을 받을 때 떠나기로 결심했다. 신선하고 적절한 음악들을 알아서 선곡해주는 유튜브의 세계로 넘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유튜브 프리미엄을 첫 결제한 달에, CD플레이어를 사게 된거다.
충동구매였다. 서울에 간 김에, 갑자기 음반을 파는 매장에 가고 싶어졌고 합정에서 검색을 해보다가 군산에서 종종 들리던 '마이페이보릿'에 가게 된거다. 거기서 호철이 가오갤3의 OST 음반을 샀다. 나는 한동안 CD를 사본적이 없으니 여름용 포스터를 한 장 사서 돌아왔고, 용산역에 조금 일찍 도착한 김에 아이파크몰을 구경하다가 무인양품에 들러 그냥 한번 또 그 CD플레이어가 있는지 확인했다. 요샌 CD를 넣는 것이 아니라 그 벽걸이 모양으로 블루투스가 가능한 스피커가 나오고, CD플레이어는 매장에 없었다. 지금은 팔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매장에서 나와 길을 잃듯이 아이파크몰을 돌다가 갑자기 옷가게 사이 어딘가에서 음반을 팔고 있는 매대를 발견했다. 클래식 이나 유명한 팝음반들을 주로 팔고 있는 곳이었고, 무인양품 CD플레이어에서 음악이 재생되고 있었다. 돌아가고 있는 플레이어 옆에는 그 옆에는 'CDP판매'라고 쓰여진 작은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영혼을 빨린 사람처럼 그 CDP앞에 서서 판매하시는 분께, '이 CDP를 파신다고요?'라고 물었다. 몸과 마음이 넉넉하게 생긴 그 판매자 선생님은 이런 어린양이 아직도 있네 하는 표정으로 '네, 지금 이 플레이어 포함 3개만 남아있는데요, 시세보다 저렴하게 팔고 있습니다.', '얼마인데요?', '구만 구천원이에요.', '구만 구천원이라고요???'
구만 구천원은 십 년 전의 가격이었다. 방금 전 무인양품에서 확인한 금액은 십 구만 구천원이었고, 그간 당근마켓에 올라온 것들도 구만 구천원은 거뜬히 넘었다. 당황함과 동시에 이렇게 혹했다는 모습을 당장 보여주지 말자는 생각에 '잠시만 생각 좀 하고 올게요' 하고 동행한 친구의 손을 붙잡고 덜덜 뜰며 근처 뉴발란스 매장으로 숨었다.(원래 거기를 구경할 생각이었음) '있잖아, 저 구만 구천원은 말도 안되게 싼 가격이야. 10년 전에 저렇게 팔았다고. 내가 저것을 사는 것은 너무 충동구매일까?'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이어말한다.) '그렇지만 말야, 10년 전부터 사고 싶었던 것을 지금 발견하고 사게 되는 건 운명이 아닐까?' (옆에 있던 호철, 이미 넌 그걸 샀어, 라는 표정으로) '운명이지'.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다시 CD매대로 돌아갔다. 그 호방한 직원분은 역시나 돌아왔군하는 표정으로 '검색해보니까 싸긴하죠~? 저희가 아주 오래 전에 이 물건을 사놓았는데 창고에 쳐박혀 있다가 얼마 전에 발견한거에요. 대표님이 15만원에 팔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오래된 걸 누가 사냐며 말도 안된다고 9만 9천원에 판다고 했죠'라고 썰을 풀었다. 바뀐 것은 박스 커버의 디자인 뿐이었다. 그 직원의 맘이 바뀔까봐 조마조마한 채로 10년 만에 사고팠던 CDP를 품에 안고 집에 돌아왔다.
오자마자 블루투스 스티퍼가 있던 자리에, 마치 그곳을 위해 있었던 것 같은 거실 벽면에 CDP를 걸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길거란 걸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낮에 '마이페이보릿'에서 샀던 가오갤3 음반을 들었다. 첫번째 노래는 라디오헤드의 CREEP이었다. 언제 들어도 20대를 소환하는 노래였다. 낭만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들, 그걸 언제까지나 지속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