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와글
by.탱
1. 4월이 가까워 온다. 벌써 학교 일 마무리 한지 1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뭔가 힘내서 휴식을 취하려고 노력했었는데 나는 잘 쉬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아침엔 역시 일찍 일어나고 낮에는 낮잠도 못 자고 밤엔 예전처럼 늦게 잠이 든다. 그냥 피곤해서 주저리...
2. 대학교에서 일하던 선생님들과 점심식사 약속을 잡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다들 시간에 쫓기는데 나만 아니라는 짜릿함이란.... 식사를 하고 코로나 지원금을 신청하러 갔는데 사람들이 많았다. 기다리는 것도 싫고 해서 서류를 준비해서 갔는데 잘한 듯싶었다. 코로나 확진 문자를 캡처해서 담당자분 휴대폰으로 전송하고 나니 가도 된다고 한다. 역시 준비가 철저해야 금방 끝난다.
3. 이제 4월 1일부터 출근을 할 것 같다. 오늘내일 이틀간 교육을 받고 나면 이제 계약서를 쓰고 새로운 직장에서 일을 하게 될 테지.. 새로운 시작을 엄청 기대했는데 막상 눈앞으로 다가오니 조금 더 열심히 쉴걸 하는 생각이 든다. 날이 따뜻해지고 꽃이 필락 말락 해서 그런가... 맘이 싱숭생숭 울컥울컥 간질간질하다. 껄껄
4. 친한 후배와 그의 여자 친구와 식사를 했다. 부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부럽다 젠장..... 아무튼 그런 자리가 나도 처음이라 어색하고 했는데 술이 한잔 들어가니 분위기는 금방 풀렸다.(역시 술) 이런저런 이야기에 내 진심을 다해 좋은 아이라고 말해주었다. 친한 사람이라 팔은 안으로 굽는다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진심을 담았다. 깊은 이야기도 하고 나름 재미는 있었지만 맘에 걸리는 게 하나 있어.... 음...... 괜찮겠지...?
5. 어느새 시간은 흘러 토요일이 되었다. 날이 너무 좋아서 담배를 피우러 나간다는 핑계로 계속 밖에 나갔다. 햇빛은 따뜻하고, 이젠 정말 반팔을 꺼내 입어야 할 것 같은 날씨에 저절로 웃음이 났다. 코끝이 간질간질해서 집에만 있다가는 정말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 일단 샤워를 시작했다. 매일 샤워할 때 듣는 음악을 틀어놓고 미지근한 물에 몸을 맡겼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물이 너무 좋아 한참을 서있었다. 샤워를 다 하고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어디를 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단은 벚꽃 보러 가자!! 하는 생각에 출발을 했다. 차를 타고 나가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니 개나리는 만개했고, 기대하던 벚꽃이...... 거의 없네...? 그래서 호떡 사서 집에 왔다... 결과는 어땠든 과정이 너무 설레고 좋았다. 다음 주에는 진짜 만개할 것 같은데 그때도 혼자겠지...? 아무렴 어때 꽃이 엄청 예쁠 텐데 껄껄.
by. 빈
코로나에 걸렸었다.
코로나 양성이라는 걸 확인하는 것도 어렵고 오래 걸렸다.
바보 같은 신속항원검사..
사람마다 증상이 다르겠지만 오빠랑 나는 꽤 힘든 일주일을 보냈다.
인후통이 심하게 와서 액체류도 삼키기 어려웠다.
빈속에 약을 먹어대니 속은 메슥거리고 어지럼증도 있었다.
기저질환이 있어서 혹시나 위중증 환자가 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렇진 않았다.
코로나 걸리면 집에서 좀 쉴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약 먹고 자느라 일주일이 사라져 버렸다.
그 와중에 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코로나라는 좋은 핑계가 있었는데 그걸 맘 놓고 써먹지 못했다.
누워있는 일주일 동안 몸도 아프고 마음도 불편했다.
왜 그랬을까나. 누가 알아준다고.
자가격리가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무엇인가 나사가 빠진 것 같다,
회복되지가 않는다. 그냥 하루 종일 멍 때리고 있다. 머리가 멈춰버렸어.
한숨만 나오고 아무것도 아닌 거에 화가 난달까..
지나고 나서 코로나 핑계를 대고 있다..
by. 시내
얼마 전에 서울에서 친구들이 왔다. 이야기를 하다가 ‘천안에서 사는 장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자리에서는 뚜렷한 장점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나에게 천안은 언제나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초등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1반밖에 없었다. 6년을 같은 친구들과 보냈는데 6학년 무렵엔 이유 없이 답답했다. 그래서 중학교도 대안학교를 가볼까 하고 알아봤었다. 하지만 학비와 거리와 기숙사 생활이 두려워서 포기했다. 고등학교 땐 천안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전라도 담양에서 학교를 다녔다. 17살엔 정말로 학교가 재밌었다. 한 달에 한 번쯤 집에 왔다가 엄마가 빨리 학교에 가라고 해도 아쉽지 않은 마음으로 냉큼 학교로 돌아갔다. 그러곤 대학은 다시 천안으로 왔다. 인 서울에 실패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원하는 전공이 천안에 있었고, 유일하게 지원한 학교에 합격했다. 대학교를 재미없게 다니긴 했지만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시기였다. 그러곤 천안에 머물던 친구들이 자기 일을 찾아서 대부분 상경했다. 20대 땐 항상 서울을 꿈꿨던 것 같다. 한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천안에 자리를 잡게 됐다. 아무래도 사과나무에서 일하게 됐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로 사과나무에서 일하게 됐고, 거기서 20대 내내 해소되지 않았던 나의 문제들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일하는 또래들을 만날 수 있었고, 사과나무에서 나의 쓸모를 계속 찾아주었다. 일을 서툴게 하면서도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과 세상을 만날 기회가 생겼던 것 같다.
얼마 전에는 호두 구판장 친구들과 시작한 책모임에서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을 읽었다. 어려운 책이었지만 납작하게 이해한 대로 말해보자면. 사람됨은 자연한 것이 아니란다. 사람됨을 수행하고 연기하고, 또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의해 그냥 인간이 아닌 사람이 되는 거라고 한다. 나의 사람됨은 사과나무로부터 받은 부분이 큰 것 같다. 사과나무에서 일하면서 일과 어떻게 관계 맺을지, 또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맺으면 좋을지 배우고 있다. 그래서 내가 천안에 살면서 가장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사과나무에서 일하는 점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배운 좋은 것들을 우리 교회 가서 써먹는다. 우리 교회 애들은 이미 나의 서툼을 다 눈치챘음에도 잘 덮어주고 채워주면서 같이 놀아준다. 그게 나의 안전망이고 울타리라고 느낀다.
그게 천안의 장점인 것 같다. 지금 여기에 살게 하는 이유들이다.
by. 산
몇 년 전부터 미리 봄을 찾으러 남도에 간다. 여행 계획과 맞물려 평화바람의 '봄바람 순례단'의 일정이 겹쳐있어 겸사겸사 진도-목포-하동에 가는 일정에 함께했다. 세월호 참사 8주년이 되기도 했고 여태껏 팽목항을 못 가본 것이 민망하기도 하여. 가는 길은 고 이한빛 피디의 어머니, 혜영 님과 함께했다. 워낙에 이른 아침이고 낯을 많이 가리는 터라 무거운 걸음으로 조용조용 진도를 향해갔다. 혜영 님은 팽목항에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편하게 가게 되어 고맙다는 말을 계속하시며 휴게소 간판이 보일 때마다 자기가 꼭 따뜻한 밥을 살 테니 휴게소에 들르자고 하셨다.
4시간 넘게 걸려 진도에 도착했다. 시간이 부족해 김밥을 몇 줄 사서 먹고 팽목항으로 갔다. 도착한 순간 그 허전함에 할 말을 잃었다. 304명이 죽어나간 참사의 현장은 방치되어있었다. 세월호기억관이라는 옹색한 간판이 달린 컨테이너 박스가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의 전부였다. 활동가나 가족들이 곳곳에 채운 전시물들이 있었지만 기억관의 구색을 갖추기엔 너무나도 초라했다. 몇몇 조형물들과 등대로 가는 길의 타일들, 낡아가는 노란 리본들이 전국에서 보내온 현수막들이 그나마 이곳이 한 때 슬픔과 추모로 가득 찬 현장이라는 것을 알게 했다.
팽목항을 낀 언덕 위에 커다란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국민해양안전관'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것이었다. 2019년 착공 계획이었는데 완성되지 않았다. 왜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관'이라는 이름을 달지 않았을까? 세월호가 해양안전만의 문제였나? 왜 이렇게 참사의 현장을 감추고 이름을 지우고 싶어 할까? 진도를 떠나오는 길에 혜영 님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씀하셨다. 이렇게 지우고 감추면서 얻어지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고, 그래도 세월호 참사가 아니면 이렇게 후미진 곳에 멀리 찾아와서 김밥이나 한 줄 사 먹었겠냐고.
팽목항을 떠나 목포 신항으로 갔다. 안전문제인지 관리의 문제인지 평소에는 세월호를 가까이에서 볼 수 없다고 했다. 목포의 활동가들이 주말마다 돌아가면서 안내소를 지킨다. 공무원은 주말에 쉬어야 하기 때문에. 304명의 얼굴이 담긴 현수막은 자꾸만 훼손되어서 안 쪽으로 옮겼다고 했다. 도대체 이들의 잘못은 무엇일까. 이곳에도 역시나 곳곳에 컨테이너 박스들이 있었다. 항구니까 물류를 보관했겠니 생각했는데 '유류품 보관함'이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있다. 너덜너덜한 차양막과 함께. 거대한 세월호의 주변엔 건져 올려진 잔해들이 널려있었다. 세월호를 건져 올리면서 뻘에서 실종자의 유해를 발견해서 뻘을 모아두었다고 했는데, 그렇게 얼마나 방치되어있었을까.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현장들을 보면서 유가족들은 대체 어떻게 버티며 살아갈 수 있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사 이후 지금까지 팽목항에 살고 계신 고영환 님은 언제든 진도에 방문해달라고, 여행하다도 잠시 들러주시면 자기가 좋은 밥집과 숙소를 안내해주시겠다고 하셨다. 늦게 왔다고 미안해하지 말라며. 괜찮다며.
팽목항으로 오기 며칠 전 본 정혜윤 PD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서 본 9.11 메모리얼 파크에 관련된 글이 자꾸 생각났다. 쌍둥이 빌딩에서 깨지지 않은 유리창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희망력과 회복을 상징한다는 글.
깨지지 않은 유리창이 있는 이곳은 처음 도착한 구조대와 시민들이 타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곳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희생자는 훨씬 많았을 거예요. 저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그런 것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을 할 것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아요. (...) 9.11은 대단히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가 서로에게 연민을 보여준 방식. 생판 모르는 타인을 위해 자기 삶을 던졌던 것. 같이 격려하면서 한 발이라도 내디딘 것. 뭐라도 좋으니 도움이 되려고 했던 것. 함께 슬퍼했던 것의 의미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퇘색하지 않을 거예요. 이 추모관은 자기희생의 이야기가 가득한 곳이에요.
<슬픈 세상의 기쁜 말/정혜윤/위고>
이 참사에서 현장에서 남아야 하는 건, 배워야 하는 건, 기억해야 하는 건 대체 무엇일까? 아니 지금의 꼴로 기억이나 할 수 있는 걸까?
돌아오는 길에 혜영 님은 한빛을 기억하며 썼던 책이 하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종종 그 책으로 이야기를 할 자리를 갖게 되는데 앞 뒤로 일주일은 아프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말하다 보니 조금씩 나아진다고 하신다. 이들은 아들의 목숨 값으로 '한빛노동인권센터'를 만드셨다. 두 분 다 평범한 교사였는데, 시민단체의 일을 하려니 어렵다 하시며 그래도 오늘은 팽목항으로, 내일은 스텔라 데이지호로 연대하러 길을 나서신다.
우는 사람들은 자기도 울고 있으면서, 자꾸만 우는 자들의 곳으로 간다. '봄바람순례단'은 낡은 승합차로 슬퍼하는 이들의 자리를 40일간 찾아다닌다
그러나 위기의 시대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틔우며 다른 세상을 향해 값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위기가 불평등하게 도래할 때 그 불평등을 깨트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만이 미래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삼고자 하지 않습니다. 위기를 직면하고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다른 세상을, 그리고 먼저 온 미래를, 지금 여기서 살며 투쟁하는 사람들 속에서 찾고자 합니다.
<봄바람순례단 출발 선언문 중>
안타깝게도 우는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거기서 함께 우는 사람들이 미래를 연다. 또 다른 세상은 그곳에서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