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후 차분한 랜딩을 하고 싶었으나 짐을 풀면서 대청소에, 가구까지 옮겨버렸으니 실패.
출근하자마자 새로 맡게 될 꽤 큰 일의 미팅까지 하고나니 마음이 부산스러워 쉴 수가 없었다. 저녁엔 차곡히 쌓인 맥주를 먹고 일기도 쓰고 열심히 인스타에 옮기기까지 했다. 더 이상 흐르는 말이 없어서 오늘은 쉬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알찬 하루를 보내버렸지 모야.
아침에 가혜가 혼자 조카를 돌보는 것을 발견. 가혜조카의 실물을 영접하고 싶었고 가혜도 볼 겸 부랴부랴 채비해서 천안으로. 서후는 발음만 못할 뿐 거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어린이였다. 피자를 만들어 양배추에 싸먹고, 강아지풀도 줍고 봉숭아 씨앗을 30알 정도 터뜨렸다. 장난감과 비눗방울보다 식물과 씨앗을 오래 관찰하게 될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가혜는 정말 좋은 이모였어.
사실 천안에 간 가장 큰 이유는 영화 때문. 누가 페이스북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가 헤어질결심보다 재미있다는 말을 한 것을 보고 반드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디플러스 재개관 한 김에 1시 영화를 보러. 꽤 사람들이 많았고 영화의 러닝타임도 상당히 길었다. 종종 졸긴했으나, 아마도 몇 번이고 다시 보게 될 것 같다.
영화 포스터에는 이 시대의 최고의 클래식이 될 영화.. 란 말이 써져있긴 하지만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될 사람은 얼마 없을 듯 하다. 이 영화는 너무 솔직해서 미움을 받을 것 같다. 나는 그 모습이 그저 너무 내 자신같아서 마음의 결을 쫓아가다가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사랑 안에서 자신을 가늠하는 습관, 권태로움에 빠질 때의 아슬아슬함, 이별하는 자세, 사랑했던 사람을 계속 사랑하는 일들. 몸을 가누지 못한, 결국 초라한 순간들. 그리고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드리는 나.
나는 언제나 사랑을 하면서 나의 최악을 갱신하는 사람이지만, 그래서 동시에 사랑과 연애는 여전히, 가장 나에게 중요한 일이다. 최악을 살기 위해, 알기 위핸 여전히 사랑이 필요하다. 원제는 세계 최악의 사람, 이라는데 이것마저도 너무 좋아. 최선의 사랑. 이런걸로 마무리 짓는 사랑도 있는건가. 그런거 잘 모르겠다.
여하튼 한정판 포스터도 얻어내고, 정컵에 가서 서정이를 기다리며 다시 일 모드. 으아 나는 기획할 때 가장 에너지가 솟는다. 지난번 보통의 혁신가가 좋았던 것은 계획했던 것의 98%정도가 달성되는 말도 안되는 경험이었기 때문인데, 그 경험 덕분에 좀 더 촘촘하게 보게 된다. 이번엔 더 어려운 변수가 오만가지가 되는 일이라 걱정은 되지만, 여튼 잘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 새삼스럽지만 호두와트의 경험은 30대가 되니 빛을 발한다. 기획하고, 설계하고, 소통하고, 조율했던 아주 많은 일들을.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몰라도 되는 채, 좋아하는 일 안에서 좋아하는 친구들과 해왔으니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가! 이 경험들이 나름대로 쌓여와서 처음인 일들도 나름의 경험 안에서 길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나. 대견해..
기획안의 90%정도를 쓰고 갓 귀국한 떠정이를 만나러. 일대일 감자탕엔 언제나 소주 일 잔이 필요하고 나는 뼈다귀 하나를 먹고 나머지 살들을 다 발라 알차게 멕였다. 나대 근처를 산책하며 흥미로운 사랑과 연애와 넓어진 세상과 변화와 과거와 우울과 계기와 사랑은열린문과 작업실과 첫만남의 이야기를 했다. 서정이는 몇 안되는 나의 추앙세력 중 대장 정도 되는 사람인데,
아까 그 최악의 나와 추앙의 나 사이엔 너무 큰 간극이 있어 가끔 삶이 아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