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닿을 때마다 일기를 쓰는 이유는 조만간 일기를 못쓰게 되는 날이 올까봐 무섭기 때문이지!
나를 못 믿는 삶이란 이런거다. 하루하루 닥친, 내일의 나를 끌어다써야 겨우 버티는 일.
그러거나말거나 아침에 우연히 만난 영상때문에 하루종일 몸에 리듬이 떠나지 않았다. '역시 힙합은 꼰대가 틀어야 돼'. 팔로알토, 기린, 누리코(미아내요 아저씨 누군지몰라요)의 리믹스 음악 채널인데, 이게 뭐라고 존나 좋나.........참을 수가 없어! 종종 반가운 음악이 나오는데 그보다 좋은 것은 바이브. 맥주를 마시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쉴 새 없이 틀어내는 시간. (그러면서 돈도 벌고!) 이 노래 다음, 오 다음 노래. 이 노래엔 역시 이 노래! 보기만 해도 한시간이 훌쩍가는데 디제잉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좋을꼬. 재밌겠다!!!!!!!! 연말에 음감회를 꼭 해야지.
일곱시에 또 눈이 번쩍 떠졌다. 아침에 잠이 깨면 좀 당황스럽다.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 책을 읽자니 다시 자게 될 것 같고, 운동을 하기엔 몸이 딱딱하고, 집안일은 도무지 싫고. 포트에 물을 끓여 차를 한잔 끓여마시고 산책을 나갔다. 오늘은 뒷산쪽으로. 부지런한 꽃들이 피어있고, 밤송이마저도 새삼 이쁜 시간.
어제(엊그제인가?) 길담에서 안희연의 <단어의 집>, 정혜윤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을 사왔는데 둘 다 살펴보니 단어-문장에 관한 책이다. 꾸벅 졸린 채로 안희연 책의 한 챕터를 보았다. '적산온도'. 식물이 필요한 온도를 몸 안에 쌓아두었다가 마침 알맞게 되면 꽃을 피워낸다는 말. 이 말을 들은 이후론 언젠간 이 단어가 이야기로 흐를 것 같다는 생각에 메모해두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나의 적산온도, 나의 메모.
나의 오래된 메모 중 하나. 어렸을 때부터, 나는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거나, 선택을 하고자 할 때 아주 많은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만큼 좋아하는 것 정도로 잘한다는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이정도로 어떤 선택을 내려도 되는 것인가?
예를 들면. 나는 아주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였다. 가장 발이 잰 4번 계주 선수. 초등학교 때 육상부를 할 시절, 언제나 2등이었던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체중에 가서 달리기를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나보다 빠르게 달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체중에 가나 했는데, 그 친구는 자신의 등수와 상관없이 일찍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명히 말할 수 있는 친구였다. 그러곤 거뜬히 체육 중학교를 갔고, 나는 달리기를 좋아하면서도, 심지어 잘하면서도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그 어린시절에도 무언가 푹 담구길 어려워하는 사람이어서 요상한 샘이 났다.
계기판. 나는 오랜 시간동안 그것을 기다려왔던 것 같다. 충분히 좋아하는 것, 충분히 싫어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선명한 눈금이 필요했다. 슬픔, 혼돈, 우울, 절망의 선이 있다면 그 선에 가까워졌을 때, '이제는 외롭다고 말해도 된단다'라고 말해주는 눈금. 기쁨, 환희, 성취, 즐거움에 가까워졌을때, 이제 '너는 그것을 사랑한다고-함께하고 싶다고 말해도 된단다'라고 말해주는 눈금.
나이가 들수록, 나는 다행히 스스로 눈금을 만들어나가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요새 나는 글을 쓰고 싶다. 일기가 아닌 글을! 드디어 나의 적산온도를 채운 것일까.
언젠가는 말이, 단어가, 문장이 머릿 속을 둥둥 떠다닌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견딜 수 없이. 그럴 때마다 함부로 뱉어냈던 말들을 그러모으고 싶다. 말의 힌트로 이젠 이야기를 만들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늦된, 느린 이야기들을. 그래서 차곡차곡,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일기를 쓴다.
아무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언젠간 마침내 글을 채운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 서두르지 말자고 말한다, 나의 온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