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하면 일상이 마구 풍요롭게 느껴진다. 특히 요즘같은 날씨에는.
집에 앉아있는 시간에도 밖에서 막 풀벌레가 부르는 것 같아. 나와. 나와. 나와.
오전에 수원에서 회의가 있었는데 회의장소가 무려 행궁동. 원래는 회의가 끝나면 천천히 산책을 하며 놀다올 예정이었는데 뒤에 인터뷰 일정이 잡혀버렸다. 아쉬운대로 회의시간보다 먼저 도착해 행궁에 차를 세우고 팔달산 서장대까지 걸어올라갔다. 참나무가 가득한 숲이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툭툭툭툭 도토리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로 데굴데굴. 고새 아침이 지났다고 웅크리기 시작한 나팔꽃, 삐져나온 하늘들, 멀리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면서 혼자 웃고 혼자 감탄하는 시간. 오마이갓 하느님 감사합니다. 정조대왕님 감사해요. 사랑해요.
성곽을 따라 찬찬히 서문쪽으로 걸어나갔다. 행궁동은 오늘이 3번째인데, 첫번째 왔을 때 완전히 반해부렀고, 두번째 왔을 때도 완전히 반해부렀고, 오늘 역시도 완전히 반해부렀다. 이 완전히 반해부린 동네에서 일 하는 사람들 너무 부러워라. 좋은 동네를 갈 때마다 이사가고싶어진다. 여기 사는 일상은 어떨까?
오늘 회의는 다산인권센터의 30주년 기념 책자를 위한 회의. 처음엔 30주년 기념 슬로건 이미지의 방향을 찾기 어려웠는데 오늘 회의를 거치고 나니 조금은 상이 그려진다. 예전에는 누가 책자를 맡긴다고하면, 특히 그 일에 정성을 쏟고 있다면 '아무도 안 보는 책자를 왜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곤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충분히 이해돼. 잘 만들고 싶다! 애쓰고 싶다! 그리고 애쓰고 싶은 마음은 서로 전해져서, 결국엔 애정을 담은,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
으, 잘하고 싶다!
시간을 배려해주신 덕분에 맛있는 우동(짱마싯!)도 챙겨먹고 나올 수 있었다. 사과나무에 잠시 들러 일을 보고 다시 아산으로 인터뷰하러. 에디터분들의 첫 인터뷰 정도에만 동행해볼까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 다녀오니, 최대한 시간낼 수 있는만큼 내어 만나러 다녀오고 싶어졌다. 너무 좋은 이야기들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데 글은 내가 안써.. 너무 멋져...!
여튼 시간이 촉박해 최대한 주변 사람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안 그래도 궁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멋진 언니였는데, 만나고 나니 정말, 나 탁월한 선택을 했었구나!
사과나무에 처음 일하면서 지역의 활동가들을 정말 많이 만나게 되었는데, 언니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아주 가끔 사장님을 따라 술이나 밥을 함께하게 되고, 주론 페이스북에서 더 자주 만나 내적 친밀도만 높아져있는 관계. 그런데 우리가 만나온 애정과 시간에 비례해 언니에겐 많은 선물을 받았다. 일을 시작할 때 쯤이었는데, 연말이 되니 언니가 예쁜 포장박스에 담긴 양말을 선물해 준 적이 있다. 나는 그때부터 이렇게 작은 선물로 서로 다정해질 수 있구나, 나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라는 걸 처음 생각해보았던 것 같다. 나는 변변찮은 선물 하나 못했는데 언니는 그 뒤로도 종종 사무실에 들러 선물을 주는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대학 다닐 때도 그런 언니가 있었다. 모두가 임용고사에 몰두해있던, 도서관 새벽 자리에 슬쩍 포장도 되지 않은 꽃 한송이와 엽서를 두고 가거나, 작은 인형, 그린 엽서와 편지를 선물해주던 누리 언니. 그런 경험이 처음이어서, 낯선 따뜻함을 느꼈다. 언니란 좋은 것이로군.
나는 사실 '언니'란 존재조차가 무서운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니, 집주인 집에 자주 맡겨졌는데 거기엔 무시무시한 언니들이 있었다. 나와 6~8살 차이가 나는 언니들. 언니들은 착했지만 나를 다정하게 돌보는 타입은 아니었고, 가끔 무섭게 타박을 놓았다. 나는 5살 언니들은 고작해야 11살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나는 그 11살 언니들이 무서워서, 맡겨질 때마다 덜덜 떨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언니들은 항상 부담스럽고 무서운 존재라는 생각에 나는 주로 또래나 어린 동생들과 놀았다.
그러다 일을 하며 좋은 언니들을 만났다. 먼저 이혼한 언니들은 내가 이혼할 때 집으로 불러들여 펑펑 울 때까지 술을 마셔주었고, 어리석고 잘못한 나를 혼내주기도 했고, 주기적으로 밥을 사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장효안이 언니는 나랑 같이 살아주면서 내 못난 일상의 습관들을 타박도 없이 잘 견뎌주었고, 언니는 모르지 내가 얼마나 언니를 닮고 싶어했는지. 사실 언니라고 부르기에 간지러워서 입 밖에 꺼내보진 않았지만, 언제나 언니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언니들.
최근에 이슬아 글에서 만난 언니 이야기가 그래서 더 반가워서 꾸욱 마크를 해두었는데, 마침 그걸 본 진하가 글에 나온 '엄살원'이 바로 우리집이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우와 나 그런 언니가 되었구나!
사실 그걸 위해 얼마나 많은 애정과 시간을 쏟고 있는지. 좋은 언니가 되고 싶어서, 온갖 다정을 바친다. 산책으로 채운, 충만한 다정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