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연하고 새롭게_9.18

by 소산공원

나는 좀처럼 느리게 걷는 법을 모른다. 아주 예전에 길에서 어떤 사람이 혼자 아주 빠른 걸음으로 종종거리며 걷는 것을 보고 조금 웃은 적이 있다. 어느 날 내 걸음이 그 사람만큼이나 빠르다는 것을 알고 혼자 민망했던 기억.

평일의 날은 휘젓듯이 빨리 걷지만, 주말에는 의식적으로 힘을 빼고 걸으려고 노력한다. 주말에 밖으로 나설 땐 반지도 시계도 브라도 내려놓고, 가볍게 나가서 느리게 느리게 걸으려 한다. 이게 아주 어렵다.


요새 왜 자꾸 아침마다 눈이 떠질까? 보통은 다시 잠들지만 요 며칠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확인한다. 안개가 자욱한가? ->그렇다. 나가자. 집을 나섰는데 나오자마자 맑아졌다. 안성에는 새벽시장이라는 게 있다. 형태를 갖춘 시장이 아닌, 지역농민들이 직접 물건을 가져와 판매하는 직거래 장터. 그게 매일 새벽 4~8시 사이에 열린단다. 한번쯤 가보고싶었지만, 나의 우주엔 새벽아침은 없었으니 생각만 하고 있다가 오늘 드디어 나도 새벽시장에 가본다. 인스타에 자주보이는 토마토비빔밥을 해볼 요량으로, 기대하며 아침 산책을 나섰다.


가을이 언제오나 싶었는데 아침에 숨어있었구나. 가는 길목에 요새 자주 보이던 보라색 열매의 이름을 배웠다. 작살나무라니. 귀엽고 훔쳐오고 싶어! 출근길마다 보던 보라색 나팔꽃도 가까이 보았다. 여름 내 본 기억이 없는데 원래 조금 늦 여름에 피는건가 아니면 내 눈이 밝아진 것인가? 예전에 서울집 마당에 나팔꽃이 있었다. 그걸 너무 좋아해서 매일 한 송이씩 따서, 보라색 크레파스로 스케치북을 채우던 기억. 그 크레파스는 아카시아 냄새였는데 지금도 아까시 크레파스 냄새만 맡으면 아련해.


35분 정도 걸어가니 새벽시장이 있었고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졌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있었다. 2000원으로 마지막 남은 가지를 다 털어왔다.

'허허허 마지막 손님이 이렇게 오네 허허허허 다 가져', '아니 이걸 다 어떻게 먹어요^^;;;', '허허허허 볶아먹고 지져먹고 삶아먹고 구워먹고 다 먹어 허허허허'.

동글동글 예쁜 버섯을 사고, 토마토는 구하지 못했다. 생강과 여주, 호박잎, 포도, 밤이 가장 많이 나와있는 품목이었다. 채소가 필요하면 꼭 다시 와야지. 채소 금값이라는데 여기 껌값이잖아!





집으로 돌아와서 한 김 씻어내고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 여러개 책을 쌓아놓고 재미없어지면 다른 책, 재미없어지면 다른 책. 이러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12시에 깨서 김치볶음밥을 해먹고 보개 도서관으로. 독립출판물이 있다는 소식만 듣고 갔는데 세상에 만화책 도서관이었다! 만화카페만큼 시설이 좋은, 좋아하는 만화책들이 잔뜩 있는!! 공공의 대접은 이렇게 하는거다!!!!!!! 안성 객사가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일을 좀 하다가 만화책을 보다가, 푹신한 쇼파침대(!)로 옮겨 또 뒹굴거리며 만화책을 보니 벌서 6시. 문을 닫을 시간이다.



오늘은 노을이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안성농장으로. 언젠가 노을을 보기 좋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있다. 30분 정도 이동하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어제만큼 커다란 해는 아니었지만 언제봐도 좋은 붉은 해. 차를 세우고 무언가 좋을 것이 분명한 커다란 나무가 있는 길목으로 터덜터덜 느리게 걸었다. 밑둥이 멋진 나무들.

아, 최근에 나무껍질의 주름을 관찰하다가, 나무의 표면은 나무의 살이 터진거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매년 안에서 연하고 부드러운 살이 차오르니까 둘레는 자꾸만 터져나가고. 그것대로 단단해지고, 결을 내고, 문양을 만들어 낸다. 오래 산 나무들도, 계속계속 안에서 새로 자라난다고. 테두리들을 만들어내고 안과 밖으로 나무가 된다고. 조금씩 연하고 새롭게. 단단하고 다채롭게.



길을 걷다보니 낡은 것들이 조립되어 만들어진 특이한 모양을 건물이 하나 보인다. 저것인가보다. 주변엔 함부로 사진을 찍지말라는 경고문이 마구 붙어있고, 역시나 누군가가 거친 길로 들어가 근처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나도 거친 길로 따라 들어갔다. 아 노란 노을. 노란 노을을 보면 뭔가 억울하단 느낌이 든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다가 잠시 붉어지고 어두워지는 하늘. 운 좋게, 정말 좋은 하늘을 보았다. men i trust-i hope to around를 들었다. 안성의 좋은 노을자리를 발견했다. 나는 웅이보다 안성에 좋은 곳을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이렇게 보낸다. 이게 너무 익숙하고, 그래서 좀 이상하다.




집에 와서 가지를 볶고, 생선을 구워 저녁을 먹었다. 이제야 살림을 할 기운이 생긴다. 꼬박 3주정도 걸린 것 같다. 시간이 오잉오잉하며 가고. 저녁이 되면 기분이 가라앉고. 오늘은 안동소주랑 진저에일. 이제 집에 있는 술도 거의 동이 나간다. 다음주는 차를 좀 마셔봐야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봄은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