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하는 이유 (w/ 코요 작가님)
소설을 쓰고 있다. 일단 무언가를 쓰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면, 단어와 단어 사이를 온몸으로 더듬는 (유쾌하고 소모적인) 작업이 시작된다. 예를 들어, 지난주엔 다음의 문장으로 이야기 속 중심 사건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나는 첫 직장을 관두고 나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여 있었다.”
여기서 내가 고민에 빠진 지점은 (회사를 그만둔) 주인공의 심리를 대변할 수 있는 적당한 어휘의 선택에 관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관두고’라고 적어 결단력 있는 인물의 태도를 보여줄지, 아니면 ‘때려치우고’라는 말로 심리적 한계에 다다른 주인공의 상태를 부각할지, 그것도 아니면 무미건조하게 ‘퇴사하고’라고 써서 그 일과 ‘나’ 사이의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할지를 두고 생각에 잠겼다.
물론 무엇을 선택하든 소설의 서사적인 측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의미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구석일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낱낱이 모여 전체적인 글의 성격과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믿는 것이, 그런 지긋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야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나의 오랜 습관인 것이다.
이런 까탈스러움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십 대에 교실에서 제일 트집을 잘 잡는 아이였다. A를 A'으로 이해하라고 하면 거듭해서 암기하는 쪽보다는 오히려 되묻거나 따지는 쪽에 가까웠다. 무언가를 새롭게 배울 때마다 명쾌한 기분보다는 복잡하고 미묘한 기분으로 마음이 뒤덮였다.
중학교 땐 과학 질문을 적은 수첩을 들고 쉬는 시간에 선생님을 쫓아다녔는데, 한 번은 시험에 나오지도 않는 쓸데없는 것을 자꾸 물고 늘어지니 피곤하게 여긴 선생님이 내 수첩을 복도의 계단 밑으로 던져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분이 나빴을 법도 한데,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는지) 나는 아래층으로 뛰어가 잽싸게 수첩을 찾은 후에 다시 교무실로 달려갔다.
선생님이나 친구들을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에게 왜 그런 것들이 궁금하니, 라는 말을 많이 듣다 보니 스스로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자문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썩 좋은 질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보단 그런 궁금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 수 있는지에 집중하는 편이 더 좋았겠다는 사실을 지난해 시 창작 수업을 들으며 깨달았다.
시인이 직접 여는 그 강의는 수강생들이 자신의 작품을 가져와 낭독을 마치면 함께 합평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어느 날 내 작품의 낭독을 마치고 선생님이 말했다. “S 씨는 직관적으로 문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이 있어요. 그건 배운다고 되는 건 아니야. 타고나는 거거든.”
그날 집에 가는 길에 생각했다. 어떤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으면 복잡성이 되지만, 문학적으로 풀어내는 순간 의미가 되는구나. 나라는 사람의 내면은 트집과 의심과 궁금증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말하고 기록함으로써 흔적을 남기게 되는구나. 까탈의 까닭을 찾은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가장 작은 단위부터 사유하려는 습성. 그건 무엇이었을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나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었던 것 같다. 그 욕망이 계속되는 이상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도 변함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문학을 하는 일이란 나라는 인간의 뒤틀림을 발견하고 해소하는 경험을 통해 복잡한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게 되는 과정이다.
‘어떤 타인이 나를 전적으로 책임지기에 나는 너무 비상하고, 까다롭고, 총명하다. 누구도 나를 완전히 알거나 사랑할 수 없다. 오직 내 자신만이 나와 끝까지 함께할 수 있을 뿐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 코요 작가님의 글
: https://brunch.co.kr/@singwithme/4
#수수한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