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과 공간 (w/ 코요 작가님)
비대면 수요가 증가하면서 급격히 떠오르고 있는 공간이 메타버스다. 이는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갖고 새로운 인격의 아바타로 활동할 수 있는 가상의 세계다. 각종 오리엔테이션, 전시회, 공공기관의 행사, 브랜드 제품 판매까지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메타버스 붐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메타버스의 미래 전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 확실한 것은 너도나도 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페이스북은 작년에 상호를 ‘메타’로 변경했고, 메타버스 관련주의 주가는 폭등하고 있으며, 정부는 메타버스의 대중화를 이뤄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이렇게 많은 이들이 메타버스에 호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메타버스 산업이 커져 대중화에 성공한다면, 정말 각종 뉴스 헤드라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차별이 없는’, ‘나의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생태계가 펼쳐지는 것일까. 이에 희망을 거는 이야기는 충분히 넘쳐나기에 다소 비껴 난 시선으로 내가 우려하는 지점에 대해 몇 마디 적어보려 한다.
메타버스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가상의 세계다. 매우 고전적인 영화 <트루먼 쇼>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트루먼 쇼>에 나타난 세계를 ‘미디어에 의해 좌우되는 세상’과 ‘리얼 월드’라는 두 겹의 구조로 살펴볼 수 있듯이, ‘기계적으로 설계된 가상의 세계’와 ‘현실 세계’에서 전자를 대변하는 것이 바로 메타버스다. 그 공간에서 아바타에게 맡겨진 일은 무언가를 새롭게 개척하는 일이 아닌 이미 조작된 프로그램에 순응하는 일이다.
메타버스는 하나의 세계관을 프로그래밍해 자본을 유치하는 기업과 이를 향유하는 소비자에게 서로 다른 역할을 끊임없이 요구하며 제 형태를 갖추어 나간다. 기업의 역할은 오프라인 시 투여되는 각종 비용을 절감하고 소비자가 매혹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다. 기업의 입장에선 현실에서 누릴 수 없는 것들을 사용자에게 제공해 그들이 메타버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바깥의 영역(현실 세계)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때 소비자는 현실 세계의 자신을 돌볼 시간에 또 다른 자신인 아바타에 자원을 투자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메타버스가 더 정교해질수록 진짜 세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소비자들은 가상의 나를 통해 욕구를 충족하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메타버스에 지나치게 몰입하게 될 때 이들은 현실 세계에서 물리적 공간을 박탈당하거나 그곳에서 완전히 배제될 위기에 놓인다.
그렇게 되면 메타버스는 ‘현실 세계를 점유하면서 메타버스를 운영하는 자본가’와 ‘현실 세계의 파이를 박탈당해 가상 세계에 적응하려는 소비자’의 구도를 낳게 된다. 비가시적인 형태의 새로운 착취가 시작되는 것이다. 메타버스는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대안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동시에 폭력적인 공간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결국 메타버스는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에 의해 조작되는 공간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미래 세계로 보편화될 때, 그 내부에도 사회, 경제, 문화의 계급화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오직 미래적인 이미지에 사로잡혀 메타버스라는 가상의 세계를 유토피아적인 공간으로 상상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자칫하면 우리 모두의 유니버스가 아닌 돈 있는 자들의 유니버스가 될 수도 있으니. 그러한 세계에 내가 그리는 인간의 미래는 없다.
- 코요 작가님의 글
: https://brunch.co.kr/@singwithme/5
#수수한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