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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한 생각 2 : 일과 삶의 균형

비대면과 공간 (w/ 박어깨 작가님)

by 코요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에는 “나는 호텔이 좋다…… 방을 안내 받아 깔끔하게 정리된 순백의 시트 위에 누워 안도하는, 그런 경험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라는 구절1)이 있다. 청소가 싫은 건 아니지만 나갔다 오면 말끔히 치워져 있는 공간이 매력적이라는 건 차마 부정할 수가 없다. 집에는 체취, 머리카락, 각질, 우울한 일기, 퀴퀴한 수건, 반쯤 남은 액체가 담긴 컵들이 있고 거기엔 다량의 정보가 있다. 생각하지 않아도 그것은 그 곳에 있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뿜어내면서 머릿속을 헤집는다. 나는 그저 돈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는, 수많은 영들로 이 공간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지만 나로부터 뿜어진 것들에 기가 죽어서 산다.

코로나19 이후 다양한 시스템이 비대면으로 전환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별 도리 없이 사적인 공간의 일부를 오픈하게 되었다. 카메라 바깥에 아슬아슬하게 널브러진 나의 일부들 사이에서 일에 집중하는 건 어렵다. 단순히 청소가 깔끔히 됐는지 신경이 쓰이는 문제라기보다, 어울리지 않는 공간과 자아가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부산물들이 효율을 떨어뜨리고 집중을 방해한다. 직장에서 상사를 대할 때의 나, 카페에서 오래된 친구를 대할 때의 나, 가족, 얼굴은 알지만 친해질 생각은 없는 사람과의 식사자리에서, 10분 뒤에는 잊어버릴 사람과 짧은 대화를 나눌 때의 나는 전혀 같지 않다. 당연히 일터에서의 나와 집 안에서의 나는 정제됨의 정도가 다르다. TPO처럼, 공간과 일과 삶에도 제각기 맞는 옷이 있지만 어찌됐든 이 불편한 조합으로도 우리는 해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코로나19도 이제 3년차에 접어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밖에서 지친 몸을 집에 끌고 오기보다 비스듬히 몸을 뉘인 채로 노트북을 두드리는 게 익숙해졌을 테다. 공간으로 일과 삶의 균형을 잡기 위해 나름의 공간을 구획해보기도 하겠다. 그러나 상체는 출근 하체는 수면인 언발란스 패션을 입는 것처럼 빠르고 쉽게, 집이 일과 삶의 두 가지 수행력을 갖춘 공간이 되는 건 어려울 것이다. 자가 주택이 없는 사람들은 공간을 구획하는 데에도 제약이 따르고 근로소득과 대출로 마련한 집이 일과 삶을 분리할 수 있을 만큼의 면적을 갖출 가능성 또한 낮다. 또한 코로나19가 종식되어도 계속될 비대면 시스템에 맞춰 일과 삶을 함께할 수 있도록 구획된 집도 많지 않다.

집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다. 외부에서 가하는 압력과 내부에서 밀어내는 힘이 균형을 이룰 때 어떠한 모양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는 외부의 자극을 밀어낼 만큼의 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비대면 사회가 일상이 되어도, 카메라에 비친 한쪽 벽 이외의 공간에서도 온전히 한 끼 식사를 만들고 가만히 음악을 듣고 창문을 열어 새 바람을 들이고 노곤한 몸의 긴장을 풀 수 있어야 한다. 나로부터 뿜어져 나온 것들에 지지 않고 일의 능률을 유지하려면 삶에 무게 추를 실어야 하고, 그럴듯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에 무게 추를 실어야 집세를 낼 수 있다.

국내 확진자가 만 명을 넘어선 지금, 순백의 시트가 기다리는 호텔로 떠나기도 어려워졌다. 데이비드 실즈는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서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일과 삶이 공존하는 집에서 분주하게 무게 추를 이리저리 옮기며 공간에 기죽지 않는 것이 올해의 목표다. 바닥에 떨어진 슬픔 조각은 돌돌이로 감고 밤새 식은 슬픔 한 컵도 깨끗이 씻어서 말리는 것부터 시작.


1)김영하,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 56쪽.


- 박어깨 작가님의 글

https://brunch.co.kr/@shoulder/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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