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크를 타는 여고생 이야기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고등학교 입학 즈음에 어머니마저 집을 나가자, 고등학교 2학년 생 코구마는 현립 연립주택에 혼자 거주하게 된다. 부모도 친구도 취미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나날을 보내는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 코구마는 경사로를 올라가야 하는 자전거 통학에 힘겨워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중고 혼다 슈퍼커브를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 커브는 코구마의 세계를 빛나게 할 작은 변화를 가져온다.
여고생들이 바이크를 탄다고 해서 슈퍼커브를 미소녀 동물원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등장인물들이 소위 모에 그림체인 것도 아니고, 주역은 모두 여학생이지만 남자 등장인물들의 역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인공 코구마가 커브를 타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바이크 샵의 주인은 노년의 남자이고, 작중에서 일종의 멘토 역할로 계속 등장한다.
오히려 혼다 커브가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만큼 이 작품은 바이크를 타는 여학생과 커브와의 이야기로 봐야 한다. 사람 사이에서 갈등은 만화 초반부에 코구마의 집안 형편을 두고 시비 거는 같은 반 학생 정도만 등장하지, 커브로 인해 코구마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린 순간 그 빌런은 사라진다. 커브를 가진 코구마에게 그 정도는 의미가 없는 거였겠지.
사실 작품 내의 갈등은 라이더와 바이크 사이에 존재한다.
커브를 구입해서 초보 운전 중에 겪는 일들—갑작스러운 연료 부족과 주행 시 눈에 들어오는 바람 등—로 시작해서 궂는 날씨에 커브를 타는 문제라든지, 심지어 후지산을 커브로 등반하는 무모함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든지, 슈퍼 커브의 주인공들은 커브를 이용해서 하는 일에 열심이다.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라든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라든지 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예를 들어, 좀 더 편리한 삶을 위해서라도 이들은 커브를 길들이고 커브에 익숙해지고 커브를 온전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슈퍼커브의 주된 갈등은 주인공들과 커브 사이의 갈등이고, 인물들은 결국 커브를 신뢰하면서 동시에 커브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된다. (이러니 이들에게 연애 노선 따위가 들어올 공간은 없을 것이다.)
시골에 사는 학생들에게 바이크의 존재는 이제 어느 곳이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되었을 것 같다.
하루에 버스 몇 번 안 오는 곳에 살던 이들은 바이크를 통해서 평소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도로 표지판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바이크를 타는 친구와의 교류는 그들에게 동경이 섞인 부러움을—그리고 약간의 경쟁의식을—가진 채로 자기 자신을 자극하고 그 자극은 또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상대를 다시 자극한다. 그리고 그들은 끈끈한 관계 대신 느슨한 연대를 통해 서로를 성장시킨다. 커브를 통해 어느새 마음이 한 뼘 커져버린 주인공들은 커브를 타고 이제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만화 슈퍼커브는 2021년 애니 방영을 계기로 국내 발매되었지만 일본에서는 2018년에 나왔다. 라이트 노벨이 원작이고, 만화는 그다음에 나왔으며, 애니는 2021년 2사분기 애니로 방영되었다. 애니화에서는 원작 소설뿐만 아니라 만화버전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화 판 국내 정발은 2권까지 나왔는데, 수학여행 초반부까지를 다루고 있다. 원작 라이트노벨 분량으론 1권도 다 채우지 못한 정도. 애니로 따지면 제6회 첫 1/3 정도까지이다. 참고로, 애니는 원작 소설의 제2권까지를 다룬다. 원작은 현재 일본에서는 8권으로 완결되었고, 국내엔 4권까지 출간되었다.
만화판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많지 않은 만큼 혹시 슈퍼커브가 괜찮은 작품인지 맛보기를 원한다면 만화 카페 등을 통해 만화판으로 입문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만화판이건 애니 건 소설이건 간에 일상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데 그럴 처지가 못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슈퍼커브를 권해본다.
ps. 인터넷에서 주문할 때 어느 게 만화이고 어느 게 소설인지 헷갈려서 잘 못 주문했다는 글이 가끔 보이는데, 제1권 가격이 라이트노벨은 새 책 정가 기준 9,500원, 만화는 5,0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