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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WRITER Jan 28. 2021

나는 극장에서 울고 싶지 않다

안 울기 게임: 눈 감으면 반칙

수도꼭지를 잠가라


S #1

A: "오늘 시사 가? 이거 슬플 것 같아. 보다 울 것 같음."

B: "난 안 울거임."

A: "과연?"

B: "안 울거임. 잘 참을 예정."

A: "과연?"


S #2

극장 안. 한창 시사가 진행 중이다. 울지 않겠다 굳게 다짐했던 B가 코를 훌쩍이고 있다. 가방을 뒤져 손수건을 찾는다. 천뭉치를 꺼내들어 눈가에 갖다 대려는데 집어든 직물에서 낯선 탄성이 느껴진다. 발이 시려울까봐 스타킹 위에 덧신었던 양말이 자꾸 흘러내려, 지하철 화장실에서 양말을 벗어 가방에 넣어뒀던 기억이 떠오른다. 황급히 양말을 다시 집어넣고, 대충 소매로 눈물을 훔친다. 북받치는 감정을 누르려 하지만 도통 참아지지 않는다. 울고 있다는 것을 옆자리 동료가 눈치채지 않게 최대한 호흡을 고른다.


S #3

시사가 막 끝난 상영관 앞. 영화 관계자들이 입구에 서서 기자 및 배급 관계자들에게 분주히 감상평을 묻고 있다. 사실 B에게 이 영화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노림수가 보이는 뻔한 서사였다. 언제 어떻게 하면 관객을 울릴 수 있을지를 능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백열등 아래 머리를 맞대고 숱한 논의를 통해 도출해낸 보고서 같았다. 하지만 이토록 냉철한 비평 의지가 왜 눈물샘을 통제하진 못하는 것일까. 머릿속으론 '뻔하다, 뻔해! 게으르다, 게을러! 으이구 또 대충 울리려구!'라며 비소를 짓고 있지만, 눈물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다. 


B는 이미 시뻘개졌을 것이 분명할 눈 때문에 자신이 자칫 ‘이 영화에 깊이 감동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을지 조바심이 나고, 왠지 자존심도 상한다. 눈을 가릴 순 없으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상영관 앞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려 한다. 하지만 영화의 관계자 D를 마주치고 만다. 


D: "어떻게 보셨어요? 우셨군요!"

B: "아, 아닙니다..."

D: "많이들 우셨더라구요. 저도 내부 시사 때 엄청 울었어요. 볼때마다 눈물이 나더라니까요."

B: "아 네, 그런데 전 안 울었어요.^^"

D: "눈이 빨갛.."

B: "안 울었어요. 안. 울. 었. 어. 요."


나는 냉철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애초에 난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영화나 드라마 콘텐츠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는 것 자체가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아메리칸 아이돌'이었다. 대학에 다니던 어느 날 친구 집에서 '아메리칸 아이돌'의 크리스마스 특집을 보고 있었다. 캐리 언더우드였던가, 캘리 클락슨이었던가, 어느 여성 가수가 더 이상 성스러울 수 없는 목소리로 어떤 캐롤을 불렀는데, 그 때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떤 것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데에 그치지 않고 눈물까지 흘리는 일이 내게 일어나다니. 당혹스러웠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신호탄이 되어, 이후로 뭔가를 보며 눈물짓는 일이 부쩍 흔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뭘 보다가 우는 게 뭐 어떻냐고? 이에 대한 답은 직업적 이유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일반 관객으로서 극장을 찾을 때야 나 역시 감정의 움직임에 신체를 맡기고 편안히 스크린을 마주한다. 눈물이 흐르는대로, 잠이 오는대로, 웃는 대로 자연스럽게 영화를 관람한다. 하지만 기자로, 혹은 홍보 담당자로서 시사에 참석하는 경우는 달랐다. 눈물을 흘리는 얼굴만큼 사적이고 감정적인 얼굴이 또 있을까. 나와 직업적으로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공간에서 눈물을 흘리는(혹은 흘려야만 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이유는 또 있다. 직업인으로서 영화 시사에 참석한다는 것은 결국 '크리틱'을 위한 과정이다. 이 영화의 어떤 점이 강점이고, 또 약점인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웃음이나 눈물의 포인트가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 반하진 않는지, 인물의 감정선을 얼마나 잘 따라갈 수 있도록 연출했는지, 배우들의 연기가 기대치에 대비해 어떠했는지, 기대 관객수는 몇명인지 등, '내돈내산' 관람과 달리 타의에 의해 치열한 사고과정이 동반되는 시간이다. 


시사를 마친 뒤엔 나름대로 정리한 나의 의견을 누군가에게 전달해야만 한다. 이 때, 같은 깊이의 리뷰를 내놓은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A는 동요 없는 표정으로 이 영화의 장르적 한계 및 드라마의 감동, 배우의 열연과 돋보인 연출 기법에 대해 코멘트한다. B도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하지만 너무나 오열한 얼굴이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B의 코멘트에는 감정적 흥분으로 인한 오인지의 가능성, 그에 따른 우려가 따르기 딱 좋지 않은가. 물론 혹평을 할 때에는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겠다. '눈물까지 흘렸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의 포지션이 B의 것이 될 테니까. 하지만 감정을 통제하며 촉수를 세워 기민하게 영화를 관람하는, '냉철한 업계인'의 이미지는 A가 선취할 것이다.  



복병들의 등장


짧은 시놉시스에 더해 업계에 떠도는 정보들을 통해 대부분의 '슬픈' 영화, '감동적인' 영화들을 사전에 인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도 한 차례 마음을 먹고 시사에 참석한다. 마음을 먹고 들어가면, 정말로 좀 낫다. 도입부에 적은 대화가 바로 이런 영화의 시사에 참석하기 전 동료들과 나누는 이야기의 예시다. 필시 기계적인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시사에 참석할 때, 가끔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동료들과 장난을 섞어 내기를 하기도 한다. '안 울기 게임'이라고 부르면 적당하겠다. 가장 처절하고 애달프고 감동적이고 슬픈 장면에서도 눈물을 참되, 해당 장면에서 눈을 감고 있거나 딴 생각을 하는 것은 양심적으로 금한다.


그런 작품들, 그런 장면들을 아래와 같이 대충 유형화할 수 있다.


1) 오래 이별했던 가족을 찾는 절절한 여정, 그들이 다시 만나 부둥켜안는 장면.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며 눈물을 참기 힘든(나만 그런가) 것과 같은 논리다.

2) 나라를 위해 결연히 나서는 독립 열사의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는, 혹은 이것이 삶의 마지막임을 알면서도 흔들림 없이 대의에 몸을 바치는 장면. 갑자기 막 애국심이 들끓으며 벅차오른다.

3) 시한부로 인해 이별을 앞두었거나, 온갖 전근대적인 편견으로 인해 이별할 수밖에 없는 연인들의 모습. 아 이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지 않은가.

4) 어린이들의 우정. 그저 오열할 뿐...


하지만 언제나 복병은 있다. 위의 공식에 충실하지 않은 영화들 안에도 눈물을 쏙 빼놓는 당황스런 장면들이존재한다. 방심하다 털썩 무릎을 꿇게 만드는 순간들이다. 행여 이미 다 알고 있는/추측 가능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언젠가 현실 속 나를 스쳐간 적 있는 것 같은 장면들이라서, 그 때문에 사무쳐서, 혹은 너무나도 극적이지 않아 꼭 그만큼 마음이 쉽게 포개져서,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굴복하고 만다. 준비 없이 눈물을 쏟아야 했던 몇 편의 영화들을 소개해 본다.



출처: 영화 <백엔의 사랑> 공식 스틸컷/미디어캐슬


#백엔의 사랑(감독 타케 마사하루, 2014)


서른 두 살 백수 이치코(안도 사쿠라 분/<어느 가족>의 그 엄청난 배우 맞다)가 복싱을 시작하게 되면서 마주하는 변화들을 그리는 영화다. 대학을 졸업한 후 변변한 벌이 없이 부모님 집에 얹혀 살고 있는 이치코는 딱히 하고 싶은 것도, 바라는 것도 없어 보인다. 텅 빈 눈동자, 무기력한 몸짓이 그걸 말해준다. 이치코는 여동생과 시끌벅적한 다툼 후 홧김에 독립을 선언하지만, 현실은 막막하다. 단골이던 백엔샵(편의점과 비슷한 모습이다)에서 심야 알바를 시작하고, 점장, 동료, 손님, 노숙자까지 어딘지 독특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관심이 가는 남자도 생겼지만 이 관계 역시 순탄하지 않다. 늘 바나나를 사 가는 백엔샵의 단골이그 상대다. 그는 어느날 돈 대신 자신의 복싱 경기 티켓을 주고 떠난다. 언젠가 밤마실을 다녀오는 길 유독 시선을 끌었던 복싱 체육관에는 '주먹으로 세계를 뚫어라' '헝그리 앵그리' 같은 표어가 적혀있었다. 이치코는 복싱 경기를 처음 본 후, 경기가 끝나면 "서로 어깨를 두드려 주는" 이 스포츠에 매료된다. 줄넘기 몇 개 넘는 것도 힘겨워하던 이치코는 점차 복싱에 재능을 보이고, 날렵해지는 주먹만큼 체형도, 눈빛도 달라진다. 오랜만에, 혹은 처음으로, 목표가 생긴 일상이다. 


드디어 시합날, 이치코의 테마송은 백엔샵의 CM곡이다. "싸요, 싸요"가 반복되어 들려오는 대기실에서, 선곡의 이유를 묻자 그는 답한다. "저는 백엔짜리 여자거든요." 이후, 몇 걸음을 걸어 그가 링에 올라가는 순간부터 나는 눈물이 터지기 시작했다.(나만 이런 게 아닐거야..) 블루지한 음악이 시합 내내 흐른다. 처절한 패배 끝에 절규하면서도, 자신을 복싱으로 인도한 바로 그 몸짓-승패에 상관 없이 서로를 토닥여주는 포옹-을 위해 이치코는 고꾸라질듯 위태로운 몸으로 상대에게 걸어간다. 안아준다기보다, 거의 기댄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상대의 몸을 끌어안고 축 처진 이치코는 몇 번이고 말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영화 <사도> 공식 스틸컷/쇼박스


#사도(감독 이준익, 2015)


역사 수업을 통해서도, 인기 드라마들을 통해서도 숱하게 접했던 그 익숙한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정통성 논란에 시달려 온 영조(송강호 분)는 완벽에 가까운 노력으로 왕위를 영위해나간다. 하지만 세자(유아인 분)에게, 자신의 뒤를 탄탄하게 이어나가길 바라는 아버지 영조의 기준은 한없이 높게만 느껴진다. 예술과 무예에 뛰어난 기질을 갖춘 세자의 자유분방한 행보는 갈수록 영조의 눈 밖에 나고, 이는 부자 사이의 깊은 오해와 불신으로 이어진다. '조선의 성군'으로 꼽히는 영조의 가장 처절하고 비극적인 역사가 바로 이 영화에 담겼다. 


<사도>의 줄거리는 분명 '다 아는 이야기'다. 역사 자체가 스포일러인 서사다. 그래서 눈물에 대비하지 못했다. 순진한 게으름의 결과였다. 서로를 애틋해하고 따뜻하게 아껴주는 가족들의 이별과 재회만이 눈물샘을 자극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오판이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어긋나버린 두 사람. 애초에 딱히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닌 것 같은, 그러나 이제와 다른 방도가 없는, 그런 관계들을 나는 알고 있다. 꽉 막혀버린 감정과 관계에 대해 성찰하게 했던 영화다. 끔찍하리만치 아프고 저린 결말은 이미 알고 있는 장면임에도 가슴을 친다. 


왕관의 무게 아래 영조는 말한다.


"어찌하여 너와 나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단 말이냐. 난 자식을 죽인 아비로 기록될 것이다. 넌 임금을 죽이려 한 역적이 아니라, 미쳐서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래야만 니 아들이 산다. 내가 임금이 아니고 니가 임금의 아들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출처: 영화 <트럼보> 공식 스틸컷/그린나래미디어 


#트럼보(감독 제이 로치, 2015)


할리우드의 황금기였던 1940년대, 왕성히 활동하던 천재 시나리오 작가 달톤 트럼보(브라이언 크랜스톤 분/'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그 사람 맞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트럼보는 매카시즘의 광풍 아래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감옥에 수감된다. 석방 뒤에도 무거운 외압은 그의 일감을 끊어놓고, 가족들의 생계조차 막막해진다. 트럼보는 친구인 작가 이안 맥리랜 헌터를 찾아가고, 그의 이름을 빌려 시나리오를 집필한다. 이 작품이 바로 오드리 헵번, 그레고리 펙 주연의 <로마의 휴일>(1953)이다. 이 영화는 오스카 각본상을 수상하고, 트럼보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동료 이안이 수상하는 장면을 집에서 지켜본다.(1993년 아카데미는 이 시나리오의 원 창작자 달톤 트럼보의 이름으로 뒤늦게 상을 돌려주었다.) 이후 또다른 가명들로 시나리오 집필을 이어가던 트럼보는 톱배우이자 제작자 커크 더글라스(마이클 더글라스 아빠)로부터 대작 <스파타커스>(1960)의 각본 제의를 받게 된다. 이 작품의 크레딧에는 비로소 트럼보의 본명이 적힐 수 있었다. 매카시즘의 그늘이 이제 막 걷히기 시작하던 때였다. 


내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순간은 1970년, 트럼보가 전미작가조합의 로렐상을 수상하기 위해 연단에 올라 가족과 동료들에게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나라면 이럴 수 있을까, 이렇게나 포용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을까, 감탄하다보니 그만 아는 사람이 상을 받는 현장에 있는 것처럼 눈물이 나고 말았다. 끔찍했던 시절, 자신이 처한 수난에 더해 동료들의 고난을, 또 변절을 지켜봐야 했던 트럼보는 이렇게 말한다.


"(전략)...블랙리스트는 악마의 시절이었습니다. 악마의 손길이 닿지 않고서 그 시길 버틴 사람은 없어요. 미약한 개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가혹한 시절이었습니다. 우린 각자의 본성, 신념, 필요에 의해 반응했고 그건 우리 각자 처한 상황들 때문이었죠. 공포의 시절이었고 누구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중략)... 하지만 어둡던 시절 누가 영웅이었고 악당이었는지 따질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희생자들만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 평소라면 안했을 말이나 행동을 강요받았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었지만 우릴 그럴 맘이 없었잖아요. ...(중략)... 제가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누군가를 아프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로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함입니다.오랜 세월 서로에게 남긴 수많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젠 울기라도 하고 싶다


이번 글을 작성하면서는 여러 영화들을 떠올렸다. 지난 10년 간 보았던 영화들의 리스트를 꺼내보니 몰래 눈물을 훔치던 순간들이 곱게 소환됐다. 그러다 보니 '우는 모습을 들키진 않을까?' 안절부절 못하던 순간조차도, 조금 미화된 것인지 그리 싫지 않게 느껴졌다. 이 고민이 그 시절 극장에서의 유일한 걱정이었다는 점에 새삼 놀랐다. 사람 많은 극장에서 울던 기억까지도 그리워질 줄이야. 퉁퉁 부은 눈으로 상영관을 나서던 것조차 돌아가고 싶은 시간으로 남을 줄이야. 


다시 사람 많은 극장에 갈 수만 있다면, 울어도 괜찮을 것 같다. 우는 걸 들키기 싫어 소리 죽여 훌쩍댈 때, 힐끗 보일 옆자리에 당연히 사람이 앉아 있는 그 날들이 다시 오면 좋겠다. 앞뒤 관객이 꽉 차서, 자세를 고쳐 거앉거나 물을 들이킬 때 영 조심해야만 하는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 울보가 되는 것 정도야 뭐 대수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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