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론 디든t 헤지테잇 앳올
오, 샤론
<기생충>이 오스카 4관왕의 대기록을 세우며 세계 영화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지가 (놀랍게도) 약 1년이 지났다. <기생충>의 오스카 캠페인은 시상식 개최에 앞서 수개월간 이어졌었는데, 이 과정에서 감독과 배우들의 이름 못지 않게 자주 회자되었던 사람이 있다. 영어 이름 샤론 최, 한국 이름 최성재. 전문 통역사가 아닌, 영화학도이자 단편을 연출한 경험이 있는 감독인 그는 아카데미 캠페인 내내 봉준호 감독의 통역을 맡으며 세계에 얼굴을 알렸다. 통역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닌 만큼 전문 통역사들에 비해 공식석상에서의 통역 경험은 현저히 적었다. 하지만 전공자로서 영화 일반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춘데다, 봉 감독으로 논문을 쓴 적이 있을만큼 화자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시상식, 기자회견, 레드카펫, 관객과의 대화(GV), 토크쇼 등 무수한 공식 일정에서 통역을 소화한 그는 봉 감독이 뿜어내는 특유의 위트는 물론이고 성실한 답변을 위해 동원되는 풍성한 레퍼런스까지 완벽에 가깝게 전달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게 벌써 1년 전. 헤어진 연인도 1년 뒤엔 아련하게만 남기 마련인데 나는 요즘 샤론 최의 통역 영상을 어느 때보다 자주 본다(보고 또 본다). 이것은 내가 약 2개월 전부터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매년 신년 계획으로 '영어 공부' '외화 한 편 대사 외우기' '넷플릭스 볼 때마다 LLC켜기' '영어 소설 완독' 같은 과한 목표를 세우는 나지만, 단 한 번도 (한 달 이상) 실행에 성공한 적은 없다. 하지만 작년 12월, 불현듯 '친구도 못 만나고 여행도 못 가고 요가원도 못 가는 지금, 모든 답답함과 억울함을 잊기 위해 이번에야말로 진짜 영어 공부를 하겠다’는 계시같은 다짐을 하게 됐다. 화상으로 주1회 회화를 가르쳐 줄 선생님도 구하고, 약 20년(...)만에 학습지도 신청하고, 온갖 쉐도잉과 전화영어 어플을 섭렵하며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공부법을 찾아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뭔가 강력한 한 방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 때였다. 막연히 영어를 잘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끈질긴 '동기'를 찾지 못했던 내가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다시 샤론의 통역 영상으로 흘러들어간 것은.
<기생충> 캠페인으로 화제였던 당시 이미 모든 영상을 봤다고 생각했었는데, 2018년 이창동 감독의 <버닝> 간담회 영상은 자자한 소문만 듣곤 본 적이 없었다. 만연체의 문장을 끝없이 구사하는 감독의 말을 빼놓지 않고 전달하는 순발력, 기억력, 어휘력, 지구력...! 모든 수사를 동원해도 감탄을 다 표현하기 어렵다. 돌이켜보면 애초 내 영어 공부의 근본적인 목표는 영어로 된 컨텐츠를 번역이나 통역의 도움 없이 온전히 나의 세포로 소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샤론의 통역을 보며 '두 언어를 자유롭게 오가는 저렇게 근사한 과정이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했다. 그가 오스카 캠페인을 마치고 버라이어티(Variety) 기고문에서 적었던 문장들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통번역은 내 직업이 아니다. 그저 내가 아는 유일한 삶의 방법이다. 나는 20년 간 나 자신의 통역사였다. (Switching back and forth between languages has never been my job; it’s the only way of life I know. I’ve been my own interpreter for 20 years.)'
샤론 최가 온다고?
그러던 중, 영어 하수의 공부 열정을 불태워준 샤론 최의 통역을 눈 앞에서 보고 들을 기회가 생겼다. 약 1년 전인 2020년 1월 개봉해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 2020)의 Q&A 통역을 샤론 최가 맡았다. 개봉한 지 1년이나 지난 영화의 Q&A를 다시 진행하게 된 것은 <남산의 부장들>이 제93회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부문에 한국 영화 대표로 출품되었기 때문이다.
통상 오스카 후보를 노리는 작품들, 혹은 국가를 대표해 출품이 결정된 작품들은 수 개월간 캠페인을 진행한다. <기생충>의 경우처럼 감독과 배우가 수개월 전부터 해외 영화제 행사를 비롯한 리셉션에 참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해부터는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것이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국내와 마찬가지로 해외 영화제들도 모두 연기되거나 축소 개최됐다. 캠페인을 위한 루틴한 과정들이 모두 마비된 셈이었다. 이 때문에 아카데미 회원들에게도 우리 영화를 제대로 소개할 통로가 없었다. <남산의 부장들>의 제작 과정, 캐릭터를 준비하고 소화한 배우의 소회 등 영화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직접 들려줄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우리는 통역이 참여한 마스터 영상을 제작해 해외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배포하기로 했다. 샤론 최가 우민호 감독과 배우 이병헌의 이야기를 영어로 전달하는 일을 맡아줬다.
마스터 영상에는 1년 전 국내 개봉 당시 관객과 채 다 나누지 못했던 내용의 질의응답이 포함돼 있다. 아마도 샤론 최의 통역 영상 중 가장 화질 좋고 러닝타임도 긴 영상이 아닐까 싶다.(아닐지도...)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마스터 영상의 촬영은 최소 인원이 참석한 가운데 장장 2시간여 이어졌다. 우민호 감독과 배우 이병헌, 모더레이터로 평론가 피어스 콘란이 참석했다. 맨 오른쪽에 착석한 샤론 최가 감독과 배우의 답변을 영어로 통역했다. 감독과 배우 모두 영어 질문은 바로 소화할 수 있는 분들이라서, 두 분의 답변만 한-영 통역됐다.
시상식이나 일반적인 GV, 짧은 TV 코너와 달리 우리의 마스터 영상은 2시간여에 걸쳐 촬영을 진행하고, 최종 편집을 거쳐 30~40분으로 완성할 예정이었다. 샤론 최는 감독과 배우의 답변을 대부분 통으로 통역했다. 다소 즉흥적인 내용의 질의 답변이 아닌, 질문과 진행의 개요가 미리 공유되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짧지 않은 답변과 통역이 이어졌다. 아무리 개요가 미리 공유되어 있는 촬영이었다고 해도, 감독과 배우의 답변은 사전에 전혀 짜여져 있지 않았다. 긴 답변들 앞에서도 샤론 최는 전혀 머뭇댐 없이 물 흐르듯 말을 이어갔다. <버닝> 행사 당시 어마어마한 분량의 발화를 그대로 옮겨내던 그 모습을 눈 앞에서 보는 느낌이었다.
망설임도, 조급함도 없었지만 한 문장도 '퉁' 치거나 '뭉개지' 않았다. 칼로 자른듯 명확한 의미 전달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영상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한글 답변과 통역된 영문 답변을 한 문장씩 비교해 보았을 땐 더욱 놀랐다. 샤론 최는 정말로, 단 한 문장도 패스하지 않았다. 그가 모든 문장을 1:1로 대응시켜 영어로 옮겼다는 말이 아니다. 즉석에서 나오는 인터뷰이들의 문장 배열을 조금씩 변경해 더욱 정갈한 문장으로 완성하거나, 별다른 강조의 의도 없이 동어 반복된 두 문장은 하나로 완벽히 보강-결합했다. 문장의 총 갯수와 무관하게, 각 문장의 뜻은 문단 단위로 모두 정확히 전달되었다. 한국어 문장들이 그의 통역을 거쳐 보다 질서있고, 가지런하고, 감각적인 영어 문장으로 정리되었다. 그래서 조금의 '의미'도 탈락되지 않았다.
#예시(영상의 08:25)
우민호 감독의 답변
: "사실 이병헌 선배님과는 <내부자들>로 처음 작품을 같이 하게 되고, 결과가 상당히 좋았고요. 다시 같이 안할 이유는 사실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남산의 부장들>은 제가 판권을 구입할 때부터 선배님이 안하시면 작품을 만들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이 캐릭터는 어떻게 보면 셰익스피어의 햄릿같은 캐릭터의 느낌이 있거든요. 계속 후반부까지 자신이 가지는 감정이나 그런 것들을 쉽게 표현하지 않고, 밖으로 내보이지 않으면서 계속 수렴하고, 쌓아가면서 꾹꾹 눌렀다가 결국에는 맨 끝에 가서 그 모든 것을 되게 파괴적으로 분출하는 캐릭터인데, 그런 캐릭터의 표현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배우가 저는 의심의 여지 없이 선배님이라고 생각을 했고요. 물론 정치적인 소재이기 때문에 예민할 수 있는데, 흔쾌히 그 때 당시에 수락을 해주셨어요. 물론 제가 그 말씀을 드리기는 했어요. 이걸 안하시면 저는 이 영화를 엎을 수밖에 없다고. 부담을 드리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책을 잘 보시고, 또 그래서 같이 작품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샤론 최의 통역 내용
: " I worked with Lee Byung-hun for the first time with Inside Men. It came out with great results, so there was really no reason for me not to work with him again. Ever since I purchased the rights for the source material, I knew that the project wouldn’t be easy without him, because this character quite resembles Shakespeare’s Hamlet. He’s a character who, until the end, doesn’t really express his emotions, represses it, accumulates all those emotions. And then at the very end, explodes and exudes them in a very destructive manner. I thought he was the perfect actor to play such a character. I did tell him that because of political nature of the story, I thought that he might be a little hesitant in accepting this role, but he was so willing in saying yes to this project. I also did tell him that if he says no, I’d probably wouldn’t be able to go ahead with it. I didn’t mean to give him any pressure, but he really enjoyed the book, and decided to come aboard."
'유신 정권'을 뭐라고 통역할까?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유신 정권의 막바지를 배경으로 하는 정치 드라마다. 감독과 배우, 모더레이터 사이에서 '유신'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할 것이 뻔했다. 우리는 샤론 최가 이 단어를 어떻게 영어로 옮길지, 그 선택이 내심 궁금했다. 마치 '재벌(chaebol)'처럼, '유신 정권'의 '유신(yushin)'도 특수성을 반영해 음차 번역되곤 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샤론 최는 'yushin'을 'dictatorship(독재 정부, 독재 정권)'으로 번역했다. 우리의 궁금증이 괜한 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이 대담에선 '독재 정부'라는 단어만으로도 '유신 정권'의 의미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었다. 특수성이 녹아있는 'yushin' 대신에, 보다 직관적이고 보편적인 이해를 도울 수 있는 통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신'을 한자로 표기하면 '維新'으로,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역사 속 '유신'에 대한 평가가 그 의미와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는 통역이었다.
영어 공부에 불꽃이 붙었다
이번 글을 위해 우리 영상의 녹취록을 살펴보고, 샤론의 통역 결과물을 문장 단위로 쪼개 그 배열을 꼼꼼히 파악해본 것만으로도 어쩐지 영어 실력이 조금 향상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어젯밤에도 나는 영화, 드라마, 유튜브 등의 콘텐츠로 쉐도잉을 할 수 있는 영어 공부 어플로 20분(어플에서 내가 설정한 최소 학습 시간)의 공부 시간을 채우고 잠들었다. 이번 공부 다짐은 전례없이 오래 가고 있는 것 같다.
사람과 영화의 사이에서 그토록 근사한 통역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뒤, 나는 보다 나은 영어로 우리 영화를 말하는 나를 상상한다. 의지에 불꽃을 붙여 준 샤론 최 감독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감독으로서 준비 중이라는 그의 영화에도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