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여행을 기억하기
이렇게 사사로운 것이 그리워지다니
해외 여행이 이렇게나 그리운 이유를 묻는다면 저마다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누구는 공항까지 달려가는 리무진 안에서의 설렘을, 누구는 여유롭게 출국심사를 마치고 보딩 직전까지 누리는 라운지에서의 짧은 여유조차 그리워한다. 설렘을 반찬 삼아 배를 채우게 되는 공항 푸드코트의 간단한 식사라든지, 잔뜩 주문한 면세품을 수령하기 위해 무려 네다섯 자리의 번호표를 받아들고 차례를 가늠하던 순간이라든지, 이런 사사로웠던 기억들조차 모두 아쉬워지는 것이다.
너무 이르거나 늦지 않게 게이트 앞 의자에 자리를 잡고, 이미 길게 줄 선 사람들이 하나 둘 보딩을 시작하면 슬슬 짐을 챙겨 들고, 여권과 티켓을 꺼내 직원에게 내밀고, 한번 더 자리를 확인하며 비행기에 오른다. 좌석 앞 포켓에 넣어둘 소지품들은 따로 파우치에 넣어둔다. 보습밤이나 점안액, 충전 케이블, 볼펜, 작은 노트 따위가 든 꾸러미다. 친구와 나누던 카톡 대화를 마무리하고, 가족에게 '도착하면 연락할게!' 같은 문자를 남기고, 이륙 시 휴대폰은 착실히 비행기모드로 전환. 기내 안내 방송이 끝나자마자 헤드셋을 팔걸이에 연결한다. '엔터테인먼트'-'영화'-'한국영화' (혹은) '고전영화' (혹은) '칸국제영화제 수상작'(에어프랑스를 탔다면!) 같은 카테고리를 꽤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그 여행의 무드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한 편의 작품을 신중히 고른다. 그 영화의 시작이, 나에게는 여행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행기에서 인기 영화들을 보게 되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해외 세일즈를 담당하는 동료에게 궁금했던 점들을 물어봤다.
- 항공 판권을 통째로 구입하는 배급사의 존재
: 각 영화의 투자배급사가 세계 각 항공사에 영화를 직접 피칭하는 것이 아니다. 항공판권배급사가 한 영화의 (한국을 제외한) 전세계 항공판권을 구입하곤 한다. 그리고 이 회사가 항공사들에게 피칭해 다시 판권을 판매하는 식이다.
- <기생충>은 우리 국적기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 항공사는 항공판권배급사를 통해 원하는 작품들을 픽업한다. 각 항공사의 기내 영화 선정 기준이 있기 때문에 픽업되기 위해선 이 기준을 충족하는 영화여야 한다. 예를 들면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킨 <기생충>의 경우 우리 국적기의 기내영화로 상영되지 못했다. 통상 항공사들은 자국을 포함해 특정 국가나 민족을 비하하거나 이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을 선정하지 않는다. <기생충>이 한국의 빈부격차 문제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영화인 만큼 이 조건에 부합하지 않아 상영되지 못했다고 알려졌다.
- 기내 영화가 '편집본'인 이유
: 기내 영화 시작 시 '이 영화는 기내 상영을 위한 편집본입니다'라는 안내 자막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양한 연령층이 두루 즐길 수 있는 작품들(예- 15세 이하 관람가 등)을 선호하는 항공사들은 잔인하거나 선정적인 내용의 작품들을 구매하지 않는다. 극장 개봉 시 15세 이하 관람가 등급을 받은, 교훈적인 내용의 작품들일지라도 일부 자극적인 장면이 포함돼 있는 경우 편집 과정이 뒤따른다.
- 기내에서 테러 영화는 볼 수 없다!
: 비행기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 등 승객들이 직접적인 불안감을 느낄만한 작품은 선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투기 폭격 장면이나, 비행기가 아닌 헬기 사고 장면이 포함된 영화들은 상영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기내 영화로 여행을 추억하기
여행지에 도착할 때마다 새로운 향수를 구입해 여정 내내 그 향수를 사용하면 집에 돌아와서도 향기로 여행을 추억할 수 있다는 배우 정유미의 인터뷰를 읽은 적 있다. 나에겐 기내에서 보는 첫 번째 영화가 향수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눈부신 '대사빨'을 자랑하는 노아 바움백의 영화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로 시작했던 여행은 왠지 그만큼 수다스러웠다. 하지만 극 중 브룩(그레타 거윅 분)의 끝없는 허세와 이를 보며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트레이시(롤라 커크 분)의 모습이 여행 내내 뇌리를 맴돌았다. 때로 브룩에게서, 때로는 트레이시에게서 나를 발견했다. 허세를 비웃는 방식으로 허세를 부려오지 않았느냐고 누군가 따진다면 나는 할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인스타그램에 뭔가를 업로드하는 매 순간 이 영화의 장면 장면을 떠올렸다. 평론보다도 생생하게, 나는 이 영화를 소화하고 있었다. 브룩이 되기도, 그를 비룻는 트레이시가 되기도 하면서.
극장 상영 중일 때 보지 못했던 <히든피겨스>(2017)를 처음 관람한 것도 기내에서였다. 2017년 칸국제영화제 출장길에 올랐던 때였다. 기내에서 영화를 보던 중에는 처음으로, 한 시퀀스를 수도 없이 반복해 돌려보고 또 돌려봤다. 나중엔 거의 대사를 외우게 될 지경이었다. 극 중의 순간이 너무도 강렬하고 또 화가 나는 동시에, 이 장면을 그려낸 타라지 P. 헨슨의 압도적인 연기에 매료되어서였다. 프랑스 출장 중 겪은 크고 작은, 대부분의 경우 몹시 교묘했던 인종차별을 겪을 때마다 불현듯 이 영화가 떠오른 것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몰랐다.
<히든 피겨스>는 천부적인 능력치를 지닌 세 명의 흑인 여성들이 NASA 최초의 우주궤도 비행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흑인 전용 전산실' '흑인 전용 화장실'이 존재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도 백인들과 함께 물을 끓이는 것이 금지되었던, 여전히 야만적이었던 시대. 영화는 '흑인', 그리고 '여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복합적인 층위의 차별에 맞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실화 기반으로 담아낸다. 세 여성을 중심으로 영화는 희망에 가까운 그림을 그려내지만, 그 길의 어떤 장면들이 담아내는 정서는 처참하고 참혹하다. 내가 다시 보고 또 다시 보았던 그 장면은, 업무 중 볼일을 보기 위해 빗속을 뚫고 800m가 떨어진 전용 화장실에 다녀온 캐서린이 그간의 분노를 터뜨리는 신이었다. 꾹꾹 눌러왔던 분노를 끝내 뻥 터뜨리고 마는 그 장면.
"화장실이 없어요. 800미터를 가야 하죠. 아프리카까지 가서 볼일을 봐야 하고, 사내자전거도 못 써요. 근무 복장은 무릎까지 오는 치마에 하이힐, 심플한 진주 목걸이고요. 전 진주를 가져본 적이 없어요. 흑인에게 그런 걸 살 월급을 준 적이 있나요? 개처럼 일하며, 모두 만지기조차 싫어하는 흑인 전용 커피포트로 버티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죄송하지만, 전 하루에 몇 번 화장실에 가야겠어요."
음악 영화에 푹 빠져 있던 시기 <인사이드 르윈>(2013)과 <비긴 어게인>(2013)을 각각 일본과 중국 출장 길에 보았던 기억도 선명하다. 내리기 직전까지도 영화가 채 다 끝나지 않아 '조금 더 일찍 보기 시작할 것을'하고 후회한 것, <비긴 어게인>을 보면서는 나만 알 수 있을 만큼 고개를 까닥거리며 리듬을 탔던 것도. 그런 여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선 예고 없이 나를 찾아왔던 그 영화들을 다시 만났다. 그럼 얼마간 여행의 흥분에 발을 담글 수 있었다. 언제 다시 경험할 수 있을지 모를, 최소 2시간여의 비행을 기다리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로 사사롭게도 그때 그 영화들을 다시 보는 것 뿐이다. 여행지에서 산 향수를 가만히 뿌려보듯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