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OWRITER Apr 26. 2021

윤여정의 최고작은 <미나리>가 아냐

韓배우 최초 오스카 여우조연상 수상한 윤여정, 우리만의 최고작 꼽기

"아유, 미안합니다, 나만 이렇게 무얼 먹어서. 네, 하지만 법적으로 여러분은 아무것도 드실 수가 없다고 하네요. (하리보 젤리 같은 것을 꺼내 보이며) 참, 이거라도 나눠 드리우? 으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아주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꽤 비슷할 것이다. 5년 전 영화 <죽여주는 여자>(감독 이재용, 2016)의 개봉을 앞두고 진행된 라운드 인터뷰를 그는 이렇게 시작했다. 2016년 9월 말, '김영란법'이 막 시행되고 처음 진행된 영화 인터뷰였다. 대개 라운드 인터뷰가 온종일 카페에서 진행되다보니, 영화사는 인터뷰를 위해 방문하는 기자들에게 음료 한 잔 정도는 편히 마실 수 있도록 제공한다. 하지만 법 시행 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첫 행사였던 이 인터뷰에선 모두가 민감하고 조심스러웠다. 작은 병음료도 마다한 이들이 많았다. 아침 일찍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삼청동에 모인, 그리고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는" 기자들에게, 배우 윤여정이 특유의 재치로 웃음을 준 순간이 생생하다.


이 배우의 오랜 팬이었던 나는 그보다 앞선 2012년, 영화 <돈의 맛>(감독 임상수, 2012)의 라운드 인터뷰를 마치고 드물게 사진 촬영을 요청했었다. 새내기였던 내겐 '이 대배우를 다시 만날 기회가 언제 다시 주어질지 모른다!'는 조급함이 용기가 됐다. "선생님,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 주실 수 있을까요?" 했을 때, 그는 특유의 힐난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씨로 이렇게 말했었다. "아니, 나 같은 늙은 사람이랑 사진을 찍어 무얼 하려구!" ('네멋 폐인' 출신으로서, 그의 옆에 선 내 몸이 너무 떨려 그걸 감추느라 애를 먹었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살짝 미소를 머금은 '윤 선생님'의 표정은 아주 근사하게 담겼고, 나는 그걸 보고 또 내적 비명을 지르며 웃음을 삼켰다.


윤여정은 이번 오스카 레이스 중 진행된 인터뷰를 비롯해 제74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위트 넘치는 말들로 세계 영화계의 이목을 끈 바 있다. "고상한 체하는 영국인들에게 인정받다"라는 표현은 외신에서도 대서특필됐다. 때로는 와인, 때로는 담배를 곁들이며 진행된 화상 인터뷰에서는 "난 70살이 넘었기 때문에 내 집에서 뭐든 원하는 걸 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나리> 국내 개봉을 맞아 출연한 '문명특급'에서 지난 연기 인생을 돌아보며 했던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주옥같다. "그런(익숙한) 환경에 있으면 내가 괴물이 될 수 있어요" "인생은 버티는 거야" "세상엔 여러 소리가 있어" 같은 말이 그의 입을 통해 쿨하게 팔딱이는 잠언이 됐다. 지난해 오스카를 휩쓴 봉준호 감독에 이어 올해 트로피를 품에 안은 배우 윤여정까지, 해외 관객들이 '한국인들은 모두 위트가 있군'하고 생각한대도 어쩔수 없을 것 같다.


영화 <미나리> 공식 스틸컷


당신에게 윤여정의 최고작은 무엇인가요


체감 상 매일 매일 윤여정의 수상 낭보를 듣는 것 같았다. 26일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시상식의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기까지, 세계 이곳 저곳의 영화상에서 그의 이름이 불렸다. 모두 지난 3월 국내 개봉한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 2021)의 순자 역으로 이룬 쾌거다. 영화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머나먼 타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가족의 이야기다. 윤여정은 딸을 돕기 위해 미국으로 달려온 엄마이자, 사랑스러운만큼 데면데면한 손자와 매일을 보내게 된 할머니로 분했다. 선댄스부터 아카데미까지, 세계의 극찬을 얻은 이 영화와 함께 윤여정 역시 신기록을 써내려갔다. 


사실 장안의 화제였던 <미나리>의 국내 개봉 이후, 어떤 사람들은 조금 의아해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나리>의 순자는 윤여정의 새로운 모습도, 최고의 활약도 아니지 않느냐는 의문이었다. 그간 여느 젊은 배우들 못지 않게 꾸준히 다양한 작품들에서 여러 얼굴을 보여준 그였고, <화녀>와 <하녀>, <바람난 가족>과 <죽여주는 여자>, <네멋대로 해라>와 <넝쿨째 굴러온 당신>까지 누군가에겐 이미 윤여정의 확고한 '최고작'이 꼿꼿이 존재해왔다. 그러니까 이런 의아함은 '난 이미 윤여정이란 배우가 얼마나 훌륭인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같은, 기분 좋은 우쭐함의 공유로 느껴지기도 한다. 


낭보를 나누며, 나는 영화산업의 취재를 담당해 온 가까운 지인들과 그의 최고작에 대해 수다를 나눴다. 당신이 꼽는 윤여정의 최고작은 무엇이냐고.(글을 읽을 분들이 생각하는 윤여정의 최고작도 무척이나 궁금하다)  흥미롭게도 윤여정이 오스카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에서도 언급한 김기영 감독의 <화녀>(감독 김기영, 1971)부터 영화 <죽여주는 여자>,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2016)까지 각각 다른 작품들이 언급됐다. 이 작품들은 내가 꼽은 최고작들과도 전혀 겹치지 않아 놀라웠다. 그가 얼마나 균질한 예술성으로 필모그래피를 꽉 채워왔는지, 더 논의할 필요는 없었다.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영화 <죽여주는 여자> 공식 스틸컷, 영화 <화녀> 공식 스틸컷, tvN <디어 마이 프렌즈> 화면 캡처


(친구 A) "제게 배우 윤여정의 최고작은 <화녀>예요. 영화 속 명자(윤여정 분)는 초반까지 그저 전형적인 인물처럼, 순박해보이는 1970년대 시골 출신의 여성처럼 보여요. 하지만 사건의 흐름에 따라 점점 예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변모하죠. 그 모습이 정말 충격적인데, 한편으로는 굉장히 귀엽기도 하거든요. 정말 충격적으로 귀여운 장면들이 있어요. 그 표정을 보면 모두 그렇게 느낄 거예요."


(친구 B) "<죽여주는 여자>가 최고작이라고 생각해요. '박카스 할머니'라는 키워드로 이야기되는 노인의 빈곤 문제를 다룬 영화인데, 이건 우리가 그간 영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논의해 온 이야기가 아니었잖아요. 노인 빈곤, 그리고 노인 성매매라는, 어찌보면 분명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만 많은 사람을이 피하고 싶어 한 소재를 다룬 작품이에요. 스토리 역시 마음 놓고 볼 수 있는 내용은 아니죠. 이 작품에 출연을 결심하셨다는 것부터 엄청난 결정이었다고 봐요."


(친구 C) "충남 역(윤여정 분)이 없었다면, <디어 마이 프렌즈>는 조금 더 무채색에 가까운 드라마가 됐을 거예요. 아무래도 이 배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작가(노희경)가 캐릭터를 집필했을테니 배우와 인물이 더 잘 맞아떨어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시니어 세대를 다룬 드라마가 흔하지 않기도 한데, 그 몇 안 되는 드라마 속 노인 캐릭터들이 대부분 '부모' 이미지의 전형성에 갇히는 경우가 많잖아요. 극 중 충남은 가족주의적 감정에 빠진 캐릭터가 아닌, 싱글로 즐겁게 살면서 그 안의 상처나 외로움도 지닌 인물이라 좋았어요."



영화 <여배우들> 공식 스틸컷
MBC 유튜브 채널 '옛날드라마' 캡처 / MBC 드라마 < 네 멋대로 해라>의 16회의 한 장면


내가 꼽은 최고작, <여배우들> <네 멋대로 해라>


그런가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윤여정의 출연작은 영화 <여배우들>(감독 이재용, 2009), 그리고 MBC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2002)다. 두 편을 꼽고 보니, 나란히 출연 분량과는 무관하게 최고의 임팩트를 안긴 작품들이란 공통점이 있다.


그 중 내게 <여배우들> 속 최고의 장면은 (여러분에게도 그럴지 궁금하다), 옥빈(김옥빈 분)에게 던지는 여정(윤여정 분)의 한 마디로 완성된다. 


"너 화장실에서 쪼그리고 배웠니? 제대로 당당하게 피워라."


<여배우들>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에 위치한 형식미로 독특한 재미를 선사하는 영화다. 쟁쟁한 여성 배우들이 한데 모여 화보를 촬영하게 된 상황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리얼'인지 '페이크'인지 모를 대화가 러닝타임 내내 이어진다. 배우 김옥빈이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본 윤여정은 핀잔인지 격려인지 모를 한 마디로 여성의 흡연이 터부시되어 온 사회를 더없이 가볍고 경쾌하게 꼬집는다. 


<네 멋대로 해라>  최고의 장면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유순(윤여정 분)이 아들 복수(양동근 분)의 과거를 알게된 뒤의 모습들을 전부 꼽을 수밖에 없다. 그간 복수가 자신에게 가져다 주었던 돈이 소매치기를  벌어온 것임을 알게 된 유순은 복수의 돈으로 열었던 치킨집도 정리하고 자취를 감춘다. 그 뒤 홀연 다시 나타난 유순은 복수에게 가게를 정리해 건진 돈을 건네며 아들과의 인연을 정리하고자 한다. 숱한 드라마에서 그리려 했던 어머니들의 모습, 그 이상적인 얼굴의 모성애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다. 


"나는 내 나쁜 과거 중에 하나라도 버려야 되겠다. 그래야 나빴던 세월을 줄이지. 그 세월 중 하나가 너하고 네 아빠야. 그거라도 버리자. 나는 그럴래, 복수야." 

(끝)

작가의 이전글 내가 그리워하는 가장 사사로운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