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아, 애들만 없으면 학교도 참 일하기 좋은 직장인데 말이야.”
방학 중 근무일의 조용한 오후를 보내며 김 선생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전 아니에요. 애들은 없지만 공문이 많네요. 방학에 웬 공문을 이렇게 많이······.”
심드렁한 목소리와 반대로 은설의 손이 키보드 위를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당장 오늘까지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니면 그냥 담당자한테 연락 넣어주고 끝내. 개학이 내일모레인데.”
“그렇게 했는데도 손에 남은 게 많아요.”
“일 복이 붙는 사람은 따로 있단 소리가 맞다니까.”
“그게 저는 아녔으면 좋겠지만, 제가 맞는 것 같긴 해요. 이번 설에도 소처럼 일하다 왔어요.”
“왜?”
신중한 표정으로 몇 번의 클릭을 연달아 누르며 은설이 대답에 뜸을 들였다.
"뭔 일 있었어? 궁금해 죽겠어. 얘기 좀 해봐."
"오케. 하나 끝."
이내 일거리 하나를 마무리한 듯 은설이 등받이 깊숙이 상체를 밀며 김 선생 쪽을 향해 돌아 앉았다.
“동서가 아기를 낳은 기념으로 어머님이 특별히 더 푸짐하게 제사상을 차리셨어요.”
“어머. 그거 참 말릴 수도 없고."
“전을 열한 가지 종류나 준비하셨더라고요."
"웬일. 어쨌니, 그래?"
"딱 한 접시씩만 부치실 거라더니 재료 남기면 뭐 하냐면서 하는 김에 쪼끔씩만 더 하자 하시던 게 막판에 가선 다섯 소쿠리가 됐어요."
“시집에 그렇게 다 먹을 식구가 있어?”
“저랑 어머님이요. 얼려두면 다음 추석 전까지는 다 먹어 치우겠죠.”
“에휴, 전 부치면서 눈물 한 바가지 흘렸겠네.”
“미리 울고 가서 괜찮았어요.”
“시집에선 자기한테 뭐라 안 하셔?”
“사정 다 아시니까요. 노력을 안 하고 있던 게 아니니까."
"그 집 어른들은 그래도 양반들 이시구만."
"아버님은 오히려 제 눈치 보셨어요. 본인이 말씀하신 임신될 운이 다 지나버려서. 아무래도 영영 제가 임신을 못할 거라 생각하고 계신 것 같기도 하고.”
“그놈의 사주.”
“타임머신을 타고 사주명리학 만든 사람의 부모를 찾아가 '그날 밤' 일을 못 치르게 만들고 싶어요.”
“하하하하하.”
은설의 진심 가득한 농담에 김 선생이 배를 잡으며 웃어젖혔다.
“퇴근하기 전까지 공문을 다섯 개 더 처리해야 하는데 집중이 안 되네요. 커피 한 잔 하고 해요, 샘.”
“커피 마시게?”
“네. 안 마셔봐야 소용도 없는데요, 뭐. 카페모카로 마실 거예요. 찐한 걸루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 은설이 교무실 탕비실 안의 냉장고에서 커피가 든 비닐봉지를 꺼내 왔다.
교무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앉아 있는 근무조 선생들에게 하나씩 돌린 후 마지막 남은 두 개를 자리로 들고 온 은설은 김 선생에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신호를 보냈다.
“뭐야, 좀 전에 카페모카 먹을 거라고 선언해놓고 나보고 둘 중에 고르라는 거야, 지금? 그럼 난 할 수 없이 아메리카노.”
“답정너라 미안요, 샘.”
은설이 웃으며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기왕 마시는 거 따순 햇빛 받으면서 마시자.”
김 선생과 은설이 볕 좋은 운동장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아직 1월인데 날씨 이거 웬일이니? 초봄이 따로 없네.”
“오늘 13도까지 올라간다고 했어요.”
“이러다 내일모레 영하 13도까지 내려가겠지?”
“그럴지도 모르죠. 날씨가 저만큼이나 변덕이 죽 끓듯 하네요.”
“아직 결정 못 했어?”
“휴직 쪽으로 거의 기울긴 했어요. 근데 만나는 사람마다 다들 조언해 주는 얘기가 달라서.”
“누구는 휴직하래고, 누구는 하지 말라고 그러고 막 그러지?”
“네. 샘은 어느 쪽이에요?”
“글쎄. 난 휴직 안 하고 시험관 진행해서 휴직을 안 하고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맞다. 샘은 휴직 안 했었다고 그랬죠.”
“응. 난 또 꽤 오래 걸렸잖아, 시험관 성공하기까지. 마냥 휴직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안 했지.”
“시험관만 2년 넘게 진행했었다고 했었죠?”
“응. 하, 근데 그게 결코 쉽게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아니까. 휴직하지 말라고 강권하지도 못하겠어.”
“결정하기가 어려워요.”
“늘 하는 이야기지만 자기가 제일 편한 쪽으로 결정해야 해."
"그걸 잘 모르겠어요. 제가 편한 쪽이 어느 쪽인지."
"임신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몰입되어서 더 힘들 것 같으면 일하는 거고, 쉬어야 할 때 잘 못 쉬고 반 애들한테 시달리는 게 더 힘이 들면 쉬는 게 맞고."
"그쵸."
"근데 그 판단은 오로지 자기만 할 수 있는 거야. 남이 못 해줘.”
“샘 말이 맞아요."
“근무를 하느냐 마느냐와는 별개로 말이야, 어떤 식으로든 푹 쉬는 기간이 있어야 하는 건 분명해. 특히나 치료기간이 길수록."
"쉬는 기간이라······."
"쉬는 것도 하나의 과정이더라고. 나도 그래서 2년 넘게 걸린 거고.”
“그런 것 같아요. 친언니도 형부 따라 외국 나가는 바람에 6개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렇게 푹 쉬고 나서 임신이 됐거든요”
“오, 6개월 휴식 후 임신 성공에 대한 간증을 여기서 또 듣네.”
“6개월 쉬고 임신된 사람이 많아요?”
“내 주변에 좀. 그 정도는 쉬어야 몸 컨디션이 정상이 되는 건지, 다들 일 쉬고 6개월쯤 있으니 소식을 전하더라고.”
“아, 그런 건가······.”
“그만 고민하고 확 쉬어 버려. 주변에 일 쉬면서 임신된 사람 있으면 나도 쉬어야 돼. 그래야 맘이 편해.”
“하하, 샘 말대로 할게요. 휴직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우는 거 같아요, 저.”
“아, 근데 다음 학기에 자기를 못 본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쉽군.”
“학교에 종종 놀러 올 게요.”
“아서. 뭐 하러 이 동네 땅을 밟으려고 들어. 내가 갈게. 샘네 동네로.”
"마음 써 줘서 고마워요, 샘."
“뭘, 할 거면 개학하자마자 관리자들한테 이야기해야 할 거야. 그래야 신학기 계획을 짜니까.”
“네.”
그전에 먼저 준수와 담판을 지어야 했다.
시험관 진행 여부에 대해서 은설은 아직까지도 준수와 합의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첨예한 대립이나 논쟁 중의 상황인 것은 아니었다.
세 번째 인공수정에 실패한 이후 은설도 준수도 난임치료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명절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바쁘게 지나갔다.
퇴근길에 마트에 들른 은설이 거의 1년 만에 제 손으로 6개 들이 캔맥주와 커다란 넛믹스 한통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이게 필요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