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은설은 지난해 초, 전근 온 학교에 적응도 하기 전에 떠안았던 업무폭탄을 떠올렸다.
전입교사라면 업무분장 회의에 참석하는 일 말고는 3월 2일부터 정식으로 업무를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은설은 전 학교 업무를 다 마치기도 전에 교무부장을 호출을 받았었다.
입학과 생기부 업무를 담당했던 교사가 전근을 가게 되었으니, 업무 후임인 은설이 며칠 더 일찍 출근해 업무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멋모르고 인수인계를 받아 정신이 쏙 빠지도록 바삐 일처리를 하는 와중에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의 기대 때문이었다.
다음 해 이맘때에는 은설의 후임이 이 일들을 하게 되리라는 것.
‘하필이면 후임이 김유리 샘이라니. 지지리 운도 없어, 나는.’
“임신 8주래요. 유리 샘.”
2주 전, 학교 소식통인 행정실무사가 은설의 후임에 대한 소문을 전했다.
“8주요?”
“네. 9월에 출산휴가 들어가야 한다던데. 그래서 업무도 샘 꺼 받겠다고 했대요."
"그때부터 일 시작인데?"
"그러니까요. 샘 업무가 학기말에 몰려 있잖아요. 그땐 후임으로 온 기간제샘이 업무를 맡을 테니까 근무하는 중에 업무부담이 적다고.”
"아······."
은설도 비슷하게 한 적이 있었던 얕은 계산이었다.
“이게 뒤가 아니라 앞이 바쁜 업무라는 걸 유리샘이 몰랐나 보네요.”
왠지 기분이 상해 빈정거리듯 한마디를 던졌으면서도 은설은 고민을 했다.
‘이게 과연 임신 8주의 여자가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강도의 업무인가.’
같은 여자로서.
아니 인간적으로.
“나 몰라라 떠넘기고 홀연히 휴직이 들어가는 게 과연 옳은 행동인가 싶어요.”
“아유, 고양이 쥐 생각 해주고 있어, 진짜.”
과한 배려라며 철저히 은설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김 선생 역시 김유리 선생의 유산을 걱정했다.
“내가 좀 나눠서 하면 돼. 아우, 신경 쓰지 마.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누구라도 나서서 해결하겠지. 학교 일은 어떻게든 굴러가게 되어 있다니까.”
“샘이 생각해도 과하죠? 8주 임산부가 감당하기엔.”
“응.”
은설은 같은 일을 두 번 하게 된 억울함을 접기로 했다.
나 몰라라 하고 일을 떠맡겨 버렸다가 자칫 유리 샘의 아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된다면,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방치해 놓고는 시험관 시술을 하며 아기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도 어불성설이라 생각했다.
“업무 마무리되면 연락드릴게요. 그때 인수인계받으러 오세요.”
사정 모르고 집에서 입덧 다스리기에 여념이 없던 김유리샘에게 은설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세상 가장 힘들고 또 가장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을 그녀에게 마음의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았다.
김 선생이 휴직 전 날까지 초과근무신청을 하고 있는 은설을 안쓰러움과 답답함이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곧 교무실로 다시 돌아온 김 선생은 우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은설의 책상 위에 비닐봉지 한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자기 간식. 저녁 먹으러 나갈 시간도 없어 보여서. 과자랑 김밥이야. 일 하면서 먹어.”
“어머! 고마워요, 샘.”
“마지막 날이니까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그러려고 했더니만. 이걸로 퉁 해. 그나저나 일이 오늘 끝나기는 하는 거야?”
“생기부 정정대장 증빙자료 정리는 어쩔 수 없이 유리샘한테 넘기고 가야 할 거 같아요.”
“그 정도는 임신 10주도 충분히 할 수 있어. 걱정 마.”
“걱정까진 안 해요. 하하.”
“맹추 같아 보여, 웃지 마.”
“에이, 맹추는 좀 심했다. 맹추는 아니죠. 그냥 오지랖이 넓은 거지.”
“김유리한텐 내가 다 말할 거야. 자기 덕에 무사히 애 낳은 줄 알라고.”
“그건 저 떠난 다음에요.”
“어차피 내일부터 휴직이면서, 뭘. 오늘 초과근무는 몇 시까지 단 거야?”
“10시요.”
“학년도 마지막 날 교문 닫고 휴직하겠구나.”
김 선생의 말처럼 은설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교무실을 지키다가 퇴근을 했다.
순찰을 도는 숙직기사가 교무실에 남아있는 은설을 보며 놀랐고, 은설은 이제 막 퇴근을 하려던 참이었다며 양해를 구했다.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자잘한 개인 물품을 담은 쇼핑백을 챙긴 은설이 숙직기사와 함께 교무실 형광등과 전열기구를 정리하며 교무실을 나왔다.
마지막 날이 다 지나도록 반납하지 못한 업무용 노트북은 김 선생의 사물함에 넣어두는 것으로 마무리를 대신했다.
은설이 시동을 걸고 차가 예열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숙직기사가 진즉에 닫았던 교문을 다시 열어 은설에게 길을 내주었다.
“감사합니다. 저 휴직해서 올핸 이제 이렇게 귀찮게 하는 사람 없으실 거예요. 내년에 또 봬요.”
은설이 할아버지뻘쯤 되는 숙직기사에게 다정히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천천히 교문을 빠져나갔다.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긴장을 풀어선지 은설의 시야에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자꾸만 번져 보였다.
“아, 뇌가 녹아내릴 것 같네. 한 시간이나 운전하고 가야 하는데.”
지끈거리는 눈을 번갈아가며 비비던 은설이 갑작스레 울컥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당분간은 아무 생각 없이 쉬기만 해야지’하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좀 쉬었다가 다시 올게."
"그래. 두어 달쯤 푹 쉬다가······."
"그것 보다 더 많이 쉬려고."
"얼마나?"
차트를 살피던 현준이 당황한 듯 고개를 들어 은설을 바라봤고, 은설은 현준의 눈을 피해 무릎 깨에 얹어 둔 자신의 손등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 최소한 삼 개월은? 아니, 반년쯤 쉬어 보려고."
은설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은 단단한 결심을 담아 '아니'라고 내뱉은 순간이었다.
이번엔 현준이 다시 아무것도 없는 책상 위로 눈을 내렸다.
"진짜로 쉬고 싶은 거구나. 너무 오래 쉬면 다시 하기 싫어져. 기간은 정해두지 마. 쉴 만큼 쉬고 이제 쉴 만큼 쉬었다 싶을 때 다시 와."
현준은 '다시 와'에서 고개를 들어 은설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은설은 그것을 '기운이 빠진 미소'라고 생각했다.
'섭섭한가? 아니면 아쉬운 건가? 내가 다른 의사에게 가려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은설은 기분이 나빠졌다.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야, 대체?'
인공수정으로도 해결되지 않은 난임에 돌파구를 마련해 보고자 선택한 쉼이었다.
이 와중에도 현준의 섭섭함을 걱정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은설은 화가 났다.
아니, 실은 당분간 현준을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적잖은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에게 당혹감을 느낀 것이었다.
'마음이 절반은 콩밭에 가 있었으니 잘 될 리가 있나.'
못된 시어머니의 질타 같은 소리가 은설의 안쪽에서부터 울려 나왔다.
"아무 생각 안 하고 그냥 쉬어 볼 거야, 쭉. 진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너도 그동안 잘 지내고 있어, 주치의 선생님."
단단히 결심이 선 은설의 표정이 마치 영원한 안녕을 고하는 사람처럼 평안해졌다.
"싫어."
"응?"
"니 걱정하면서 지내고 있을 거야."
현준의 도발에 은설이 당황했다.
"야, 바쁜데 뭘."
"의사가 환자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 친구가 친구 걱정 하는 게 당연하지."
"······."
"진짜 병원 안 올 거야?"
"응."
"진짜?"
"그렇다니까. 병원 쪽으론 고개도 안 돌릴 거야. 너도 안 볼 거야. 니가 내 주치의니까. 진짜로 진짜로 작정하고 쉬려고 그러는 거라니까."
"······. 알아."
"······."
"푹 쉬고. 그리고 꼭! 돌아와. 내 진료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