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관계의 한계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아직 쉼이 더 필요한 건ㄱ]

탁탁탁.

첫 환자 진료를 마친 후, 현준은 버릇처럼 은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오늘 첫 환자도 은설이 아니라는 생각과 동시에 손이 저절로 휴대전화를 움켜잡았지만, 막상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까지는 쉽지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은설은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다른 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모질지 않은 은설이 현준의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것은 쓰디쓴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의사로서의 관심마저도 부담으로 느낀다는 의미인가?'

옛날처럼 또다시 홀연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불안감이 문득문득 엄습했다.

은설에게 얼굴 한 번 보기를 닦달하지 못하는 것은 다 그 때문이었다.

현준은 처음으로 은설의 난임치료를 맡은 일을 후회했다.




난임의사로서 은설을 만나게 되는 자신의 존재에는 한계가 있었다.

현준에게 오롯이 몸의 상태를 맡기고 있었지만, 은설은 마음까지 현준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위로를 핑계로 가졌던 몇 번의 만남 중에도 은설은 바람처럼 스치듯 아주 가끔 난임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일이 있을 뿐이었다.

“진료실 밖에서도 진료를 받고 싶진 않아. 의사도 그러지 않아? 진료실 밖에서까지 진료하고 싶진 않을 거 같은데. 재밌게 나눌 얘기가 하고 많은데 굳이 왜?”

현준은 강남의 한적한 골목길 카페에서 은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맞는 말이었다.

서로 소식을 모른 채로 살아왔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며, 둘 다 아는 그리운 친구 이야기, 둘 중 한 명의 기억 속에 디테일하게 살아있던 추억담의 소환······.

그리고 조금 섭섭했던 예전의 일들에 대한 소소한 푸념들까지 대화의 흐름을 이어갈 것들은 많았다.

하지만 현준의 마음 어딘가에는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다.

난임 치료를 제외한 은설과의 인연은 과거 어디쯤에 머물러 좀처럼 현준의 현재로 들어오고 있지 못했으므로.

은설은 자신의 ‘지금’에 대해서는 좀체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다 알고 있잖아. 요즘 나한테 아기 만드는 일 말고 중요한 일이 또 뭐가 있겠어. 그 중심에 떡 하니 서서 신처럼 다 보고 있으면서, 뭘 더 묻고 그래.”

슬며시 웃으며 하는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은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은설보다도 더 적나라하게 알고 기억하는 것은 자신이 분명했다.

그러나 고통의 실체가 아니라, 그걸 견디고 있는 은설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은설이 그 마음까지도 오롯이 자신에게 기대어주기를 바랐다.

언젠가 자신이

“마음이 힘들 때도 내게 기대었으면 좋겠어. 어렸을 때처럼 다시.”

라고 이야기 했을 때,

“글쎄. 그럼 속 썩이는 아이들 이야기를 좀 할까? 그건 할 이야기가 아주아주 많아.”

하던 은설의 의도를 현준은 느낄 수 있었다.

‘너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아.’

은설의 싸인을 현준은 좀처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에게도 이럴까. 임준수 씨에게도.’

환자가 드나들 때마다 은설에게 보낼 메시지를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하던 현준의 머릿속에 은설의 남편이 떠올랐다.

곰인형처럼 푸근해 보인다면서 은설이가 웃으며 말했던 서글서글한 인상, 근육 위로 살집이 도톰히 올라온 팔뚝. 그 품에 안겨 남편에게만은 시시콜콜한 속내를 터놓는 은설의 모습을 상상하며 현준은 폭발적으로 차오르는 질투심을 느꼈다.




“미주 씨한테나 신경 써. 새꺄.”

“상담을 하고 있는 거잖아, 지금 내가.”

조절이 잘 되지 않는 질투심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는 현준에게 형석은 아주 단호히 반응했다.

“돈도 안 내면서 맨날 상담 타령은.”

“니가 우리 집에서 꺼내 먹은 술이랑 안주만으로도 육 개월치 상담료는 훌쩍 넘어.”

“잘 버는 자식이 먹는 거 가지고 쪼잔하게 계산이야. 아나, 이거 받고 정신 차려.”

형석이 가방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현준의 허벅지 위로 툭하며 던졌다.

“뭔데?”

“현성스님 신간이시다.”

“제대로 이별하는 방법? 이런 걸 왜 나를 줘······.”

“제목에 속지 말고 찬찬히 읽어 봐. 니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될 거다.”

“가져 가. 별로 돌아보고 싶지 않아.”

“잔말 말고 읽어, 좀. 읽으라면 읽지 반항은. 나한테 돈 내고 상담받는 것보다 백 배 나을 거다, 그게.”

“말투에 자신감이 없는데? 직무 능력에서 오는 한계 뭐 그런 거라도 느낀 거야?”

“너랑 나의 관계에서 오는 한계가 있다, 인마. 원래 사춘기 끝난 다음부턴 친구 말은 귓등으로 들리게 되어 있어."

"솔직히 말해줘. 내가 귀찮아진 거야?"

"어디서 드라마 흉내를. 집어 쳐! 징그러워. 내가 백날 좋은 말 해줘 봐야 니 귀엔 짝퉁 상담사가 하는 말로 들린다고. 내 눈에도 너 돌팔이 의사로 보인다니까.”

“미친놈.”

“미친놈은 너지. 길가는 사람 백 명을 잡고 물어봐라. 너 이은설하고 잘 돼도 불륜이야. 불륜이 싫으면 일단 가정파괴범부터 되어야 하고.”

“좀 가려서 말해라.”

“현실을 직시하라고, 인마.”

“가라. 너.”

탐탁잖은 말만 늘어놓는 형석의 등을 현관 쪽으로 떠밀며 현준이 불편한 티를 냈다.

“허, 참, 참. 피오르드 협곡만큼이나 속 좁은 놈 같으니라고. 알았어, 알았어. 그만할게.”




현준을 달래어 겨우 다시 거실 소파로 돌아온 형석이 이제는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우리 엄마 여행 갔다.”

“그래. 재밌게 잘 다녀오시라고 용돈 좀 드렸냐?”

“여행 갔다고. 가게 문 닫고.”

“······.”

“30년 만에, 처음으로.”

“무슨 일 있으셔?”

“한번 쓰러졌었어. 협심증으로. 중환자실까지 들어갔다 나왔었어.”

현준은 그제야 형석이 한동안 연락도 왕래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연락을 하지.”

“산부인과 의사한테 연락을 해서 뭐 하게. 심장이 아픈데.”

“그래도.”

“그래도 어디 전화라도 넣어줄 수 있는 거면, 미주 씨하고나 좀 연결해 줘, 울 엄마.”

현준은 형석에게 미주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아, 미주······.

휴직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치료 경과에 따라 언제 어떻게 일정이 바뀌게 될지 미지수인 상태였다.

현준은 형석의 어머님을 미주와 연결시켜 주는 것이 옳은 지를 생각했다.

형석이 기꺼이 믿고 의지할만한 의사임이 분명하지만, 왠지 미주에게는 신경 쓸 일 하나를 더 얹어주는 일이 될 것만 같다는 부담이 느껴졌다.

“약 먹어서 괜찮다곤 하는데, 울 엄마 지금 무슨 인생 정리하는 시한부 환자처럼 그러고 있다. 여행도 그래서 간 거야. 죽기 전에 좋은 데 가본다고.”

“그러셨구나.”

“크고 좋은 병원에 유명한 의사한테 진료받게 해 주면 마음이 좀 나아질까 싶어 그런다.”

“알았어. 미주에게 말해 둘게.”

“고맙다, 친구야.”

현준에게는 거절해선 안 되는 부탁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붙어 다니며 형석이네 이불집에서 저녁을 얻어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게 뒤편에 딸려 있는 자그마한 골방에서 형석의 어머니가 내어주시는 참치김치찌개에 밥을 비벼 먹던 추억은 잊을 수가 없었다.

바쁜 부모님 슬하에서 정을 그리워하며 자란 현준을 볼 때마다 살뜰히 보듬어준 사람도 형석의 어머니였다.

“나중에 어머님 모시고 좋은데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 내가 사드리고 싶어 한다고 말씀드려 줘.”

“오냐. 고맙다. 울 엄마 생각해 줘서.”

“뭘.”

이튿날, 늦은 퇴근을 앞두고 현준은 미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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